월출산 벚꽃 백 리 길[179]
■ 구림마을(88)

총취정 오른쪽에 있는 ‘태호 조행립 사적비’와 ‘태호선생 기념관’ 전경. 이 사적비는 숙종 37년(1711)에 공조좌랑(工曹佐郎) 박태초(朴泰初)가 지었다.
총취정 오른쪽에 있는 ‘태호 조행립 사적비’와 ‘태호선생 기념관’ 전경. 이 사적비는 숙종 37년(1711)에 공조좌랑(工曹佐郎) 박태초(朴泰初)가 지었다.

경재 박태초
박태초(1646~1702)의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길부(吉夫), 호는 경재(警齋)이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낸 남곽(南郭) 박동열(朴東說)이 그의 증조부이다. 대과 초시에 합격했지만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며 지냈다. 박태초는 병조 판서 윤지선(尹趾善)에 의해 천거되었고, 그 후 건원릉 참봉(建元陵參奉),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박태초가 쓴 태호 조선생 사적비문
다음은 조행립 사적비 중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조행립의 인물됨을 알 수 있는 일화가 많이 나온다.

공(公)은 선조 13년(1580)에 서울의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12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성인(成人)처럼 예제를 지켰다. 13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을 만나 모부인을 모시고 영암으로 피난했다. 정유년(1597)에 왜구가 다시 침입하여 맏형이 그들의 칼을 맞고 죽었다. 공이 몰래 어린 동생을 업고 도망하자 적이 추격하여 붙잡혔는데 형제가 서로 죽기를 다투므로 적들도 감동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린 동생은 끝내 피난길에서 죽었으므로 평생토록 아파하였다. 

공이 난리로 나라와 가정이 허물어진 나머지 외가에 가서 의지하여 남곽 박동열에게 수업하였는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때를 만나지는 못하였다. 광해군 때에 이륜(彛倫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이 퇴폐하고 또 사대부가 원통하게 모함에 빠뜨려진 사람이 많으므로 공이 서울에 머물기를 즐겁게 여기지 않아 마침내 호남의 옛집으로 돌아갔다.
 
남에게 아첨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
공이 관직에 있으면서 대체로 자신을 가다듬어 아래 사람을 단속하고 학문을 권장하여 요역을 가볍게 하기를 힘써 정사가 밝게 다스려져 순리의 풍도가 있었다. 더욱이 번잡한 것을 결단하기를 잘하였으며 일을 처리함에 조용하고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공을 추앙하여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공은 강직을 자신의 신조로 삼아 법을 굽혀가며 남에게 따르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번번이 칭찬을 받지는 못하였다. 

강화도에 성 쌓기를 건의하다
공이 일찍이 구관청의 종사관이 되어 강화도가 아무리 바다로 둘러싸인 요해처이기는 하지만 성을 쌓아 스스로 튼튼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극력 말하였으나 조정에서 잘 수용하지 않았다가 병자호란 때에 함락됨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공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언제나 백성들의 편에 서다
그가 호남의 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절도사가 개인적으로 사람을 놓아 승도(僧徒)에게 불법으로 재물을 거두어들이므로 공이 그 사람을 체포하여 다스리고 법에 의거하여 논쟁하니 절도사가 부끄럽게 여기고 굴복하였다. 그리고 고을에서 백성들이 세력이 있는 집안에 침해당하여 사건이 매우 원통하므로 소송을 하였으나 판결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대체로 장리(長吏 수령)가 모두 머뭇거리면서 미루었기 때문이다. 공이 이르러서는 즉시 그 원통함을 펴게 하고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니 강어(强禦 억세어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은 이유였다.

향약을 만들고 회사정을 중건하다
공이 이미 늙어서는 마음속으로 늘 벼슬살이를 싫어하여 관직을 버리고 남쪽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것은 대게 임천(林泉)에서 은둔하며 여생을 편하게 지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송(錢送)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며, 노래와 시를 지어 전송하는 뜻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고향의 풍속이 퇴폐하고 야박함을 매우 슬프게 여겨 이에 향리 사람들과 옛날 송나라 때 남전 여씨가 향약을 만들어 준수하던 뜻을 모방하여 앞장서서 향약을 만들고 마을 가운데다 정자를 지어 ‘회사(會社)’라고 이름을 짓고 봄·가을로 잔치를 벌이며 신의를 강론하니 그제서야 사람들이 예양(禮讓)하는 풍속과 장례 치르고 제사 지내는 도리를 알게 되었다. 

성기동에 문산재의 전신인 서당(書堂)을 세우다
그리고 공이 또 인재(人才)가 진작되지 않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즉시 마을에서 몇 리쯤 떨어진 곳(성기동)에 서당을 건립하고 선생을 배치하여 마을에서 재주가 뛰어난 자들을 모아 가르치도록 하며 공부를 권장하는 것이 법도가 있었으므로 선비로 진취하는 이가 많았다.

지극한 정성으로 효제(孝悌) 실천
공은 체구가 장대하고 타고난 성품이 방정하고 굳세어 젊어서부터 기질(氣質)을 자부하고 의(義)를 좋아하여 남의 곤궁함을 구제하면서 언제나 미치지 못한 듯이 하였으며 일의 옳고 그름을 논함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자신의 주관을 고수하면서 남에게 붙어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았다. 집안에 있을 때의 행동은 더욱 정성스럽고 독실하였다. 효성으로 모부인(母夫人)을 섬기면서 뜻을 받들고 음식으로 봉양하기를 빠뜨리는 것이 없었으며 모부인의 상을 당함에 이르러서는 연세가 60세가 되었는데도 슬퍼함이 예제(禮制)를 벗어났으므로 남들이 그것을 어렵게 여겼다.

그리고 과수로 지내는 형수와 의지할 데 없는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이 두 집안의 많은 가족들을 공이 모두 먹이고 입히면서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또 친척과 고구(故舊 오랜 친구)에게 후덕하게 하여 그들을 대우하기를 각각 은혜와 의리로 하였다.

이웃과 친구들에게는 나눔과 섬김으로 
언젠가 친구 한 명이 전염병으로 죽었는데 그의 어버이는 늙고 자식이 없었으므로 그 친척들이 감히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하여 염습을 할 수가 없었다. 공이 그것을 측은하게 여겨 그 초상을 주관하여 판비(辦備 변통해 준비함)하고 치르기를 유감이 없게 하였다. 그리고 아무라도 혼인을 시키거나 장례를 치름에 있어 가난하여 예를 이루지 못할 경우이면 틀림없이 두루 구휼하여 주었다. 

병자호란 때 서울에 살고 있던 친구들이 난리를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온 자가 많았는데 공의 의로움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었으므로 마침내 그들이 의뢰(依賴)할 수 있었다. 

신독재 김집과 절친한 사이
공이 교유한 분들은 모두가 현사대부(賢士大夫)였으며 일찍이 문원공 김장생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그의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는 친근한 사이였다. 신독재가 일찍이 말하기를 ‘진정한 친구로서는 조모(曺某)가 있을 뿐이다’고 하였으니 신독재가 함께한 것을 관찰하면 공을 알 수 있다.

공이 졸(卒)하자 같은 마을 사람인 최진하가 동지(同志) 수십 인과 글을 지어 공의 평생 공덕을 칭송하였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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