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비가 내렸다. 언 땅을 녹이며 새싹을 트이는 만물의 에너지가 된다. 여전히 싸늘한데도 구름 안 해 오름을 아는 것처럼 이른 일손이 분주하다. 굴삭기와 고소작업차, 스리랑카 하렘과 튀르키예 카잔까지 모였다. 키 높은 편백(扁柏)의 가지를 치고 이십여 년 된 동백(冬柏)의 자리를 옮기고 있다. 가리었던 햇볕을 내리며 피톤치드와 꽃 향을 더하게 할 거다. 지난 2월 시악바우 아래 풍경이다.
선대의 혼이 깃든 땅이다. 그 한 자락 오른머리에 4대조 선영과 능선 건너 대사골에 11대조께서 잠들어 계신다. 내가 가꾸어야 할 선산을 설 전후로 십여 일 넘게, 올 초 아버지 묘소를 쓰면서 시작됐다. 아버지 청춘 때 일구어 고구마를 심던 묵은 밭의 칡덩굴도 걷어내며 분재가 다 된 동백을 찾았고, 어미가 낳은 씨가 자란 나무모를 캐내어 띄엄띄엄 새터가 되게 한 기쁨도 맛봤다.
어릴 적엔 지게질만 가능했던 곳이다. 간혹 겨우 리어카에서 이십 수년 전 콘크리트 포장길이 나며, 시세(時世) 말로 다 명당이 됐다. 차가 다닐 수 있다며 더 많은 묘소가 들어섰고, 지금도 도시화에 밀리며 외지에서 옮겨오고 있다. 땅값이 아직은 싸고 풍수가 좋다는 이유다. 그래도 묵힌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나무만 자르고 벌안을 넓히며 석물만 놓아서는 안 된다.
산세에 맞추어 호사스럽지 않게 해야 한다. 선대의 안식처는 후대의 일이요, 의무다. 고인돌, 고분, 왕릉과 피라미드처럼 사방 어디든 같은 생각이다. 조선 왕실에선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의궤(儀軌)로 기록하고, 계획 식재까지 했다. 그런 연유로 2009년에 북한 소재 2기를 제외한 40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산자의 슬픔과 회한을 덜어주는 일이다. 그렇다고 길흉화복을 점지할 수는 없다. ‘묘소 때문에 잘 된 사람은 없어도, 잘못된 사람은 있다’는 말이 있다.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이란 속담이다. 그래서 쉬 찾을 수 있는 양지바르고 물만 들지 않은 곳이면 된다. 그렇지만 땅속을 다는 알 수 없고 자연 또한 훼손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를 보완하는 게 둘레를 치고 나무를 심는 일이다.
더하면 수목원, 성경 속 에덴이 된다.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일이 됐다. 진즉 알아야 했지만, 아버지가 병든 소나무를 개량하며 젓가락 굵기를 심었던 것처럼, 서두르진 않으려 한다. 그 시작과 끝인 작은 삼거리에서, 잡목을 제거하며 비닐 쓰레기를 줍고 자른 가지는 분쇄하여 자양분이 되게 했다. 캐낸 동백은 구부러진 뿌리를 잘라, 바른 호스처럼 물을 잘 빨아 올리게끔도 도왔다.
아침이면 굴삭기가 워밍업을 한다. 마치 비상하려는 매의 날갯짓 연습 마냥, 서서히 힘을 넣겠다는 지혜다. 나 또한 철봉에 매달리며 하루를 시작하면서도, 삽과 갈퀴로 땅을 파고 고르다가 며칠 허리를 못 쓴 적이 있다. 눈보라 치던 마지막 일요일에도 돌을 놓다가 왼 발가락 위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해가 다할 때까지 신발 속 엄지발톱이 깨진 줄을 몰랐고 한동안 절뚝거려야 했다.
이제는 많이 숙달됐다. 금세 일꾼이 되어간다. ‘나무는 역시 있는 자리가 아름답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될까 싶어요’ 소리도 들었다. 낮엔 뭉게구름 하늘이 좋고 밤이면 쏟아지는 별빛에 스며든다는, 용상의 눈에 비친 풍경이다. 시악바우 아래 서호강과 넓은 벌이 ‘태윤아, 외국 같지 않니?’가 되었던 것처럼, 그의 맘도 같았을 거다. 이렇게 새해 두 달이 훌쩍 지나며 새봄을 맞았다.
시악바우는 새학바위, 서호정에선 치마바위, 지도는 철암(鐵巖), 우리 친구들 모임 이름이기도 하다. 옛 영산내해 뱃길 때는 월출산과 함께 이정표였다. 당시 국제항이던 상대포를 통해 백제 왕인박사, 신라 최치원, 고려 유학생과 상인들이 바깥세상으로 오갔다. 덕진 선암마을(무장골, 건덕암, 관풍정) 해도인 장보고(궁복)와 정년이 대륙으로, 청해진의 꿈을 그렸던 곳이다.
내 고향 풍경이다. 이젠 오랜 얘기가 되었다. 뒷메, 글씨바위(1344년 매향비), 황새바위(한새바우), 덕고개(떡국), 죽령굴, 배들래, 신당매, 사장안, 발매기, 해메기, 달은고개를 품은 그 갯골은 육해로 변했다지만 은적산에서 내린 장천(長川)과 사장나무는 그대로다. 장동사, 충효문, 수래정, 원경재, 회화나무 그리고 최근 아라리와 십여 년 전 냇갈 둑에 심은 호랑가시나무 또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장동사는 의병장 전몽성(1561~1597)과 형제들을 기리는 사당이다. 몽성은 1685년(숙종 11) 임란항의위국연생(臨亂抗義爲國捐生, 환란에 임하여 절의를 지키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여덟 자와 함께 병조참의에 추증됐다. 1776년(영조 52) 몽진과 1836년(헌종 2) 몽태 형제가 추배 된다. 1868년 서원철폐령을 입었으나 1946년 현 위치에 복원되며, 1987년 전남도 기념물 제109호가 됐다. 몽성은 임진년(1592) 7월(음력) 금산 전투 후 함평현감을 지내고, 고향에서 노모를 봉양하고 있었다. 정유년(1597) 들어 왜란이 심해지자, 나라와 사민(士民)을 위해 다시 나선다. 9월 15일 명량대첩 후에도 해안가 노략질이 계속되자, 동생 몽진(1565~1597)과 조카와 함께 뜻있는 의병들을 규합한다. 막내 몽태에게 노모를 부탁한 후 율치, 해암포, 유점동에서 많은 적을 물리쳤지만, 9월 25일 순절하고 만다. 몽성의 아들 여홍(1578~1659)은 무술년(1598년) 11월 노량해전에 참여하며 선조원종훈에, 몽태(1571~?)는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평정을 위해 두 조카(장형 몽일의 자 경홍, 도홍)와 외조카 김완(1577~1635) 장군 휘하에서 공을 세우며 진무원종훈에 책록된다. 이충무공전서와 호남절의록 등이 전하는 역사지만, 이름마저 남기지 못한 의인들 또한 많다. 오늘 하루도 헛되이 할 수 없는 이유다.
천안이 본관인 자자일촌, 엄길 마을 내력이다. 선대의 아호인 길촌(吉村)과 길림에 존경할 엄(嚴)을 더한 지명이지만, 언제부턴가 가릴 엄(奄)이 되었다. 바로 잡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