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75]
■ 구림마을(84)

창녕 조씨 종회소 총취정(叢翠亭) 전경. 취정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는 외삼문을 열고 경내에 들어서면 정면에 총취정이 단정히 서서 나그네를 반긴다. 좌측에는 제사청 건물이 있고, 우측 뒤편에 서호사 사당이 있다. 뒤로는 울창한 솔숲이 사당을 감싸고 있다. 
창녕 조씨 종회소 총취정(叢翠亭) 전경. 취정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는 외삼문을 열고 경내에 들어서면 정면에 총취정이 단정히 서서 나그네를 반긴다. 좌측에는 제사청 건물이 있고, 우측 뒤편에 서호사 사당이 있다. 뒤로는 울창한 솔숲이 사당을 감싸고 있다. 

서호사 강당, 총취정
창녕 조씨의 종회소로 1943년에 건립되었다. 총취정은 골기와 팔작지붕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재실형 건물이다. 앞쪽으로 툇마루가 있고, 우측면에 기둥을 세워 지붕을 달아내고 쪽마루를 두었다. 좌우측 각 한 칸은 온돌방이고, 중앙 두 칸은 대청마루이다. 앞쪽 다섯 개의 기둥은 반구형 주초석 위에 놓였다. 

정(亭)내에는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서호사 춘추향 축문’, 조행립이 지은 원운(原韻) 시(詩), 신흠(申欽)의 외손자 예조참판(禮曹參判) 박세모(朴世模 1610∼1667)의 기문(記文), 안동 김영한(金甯漢 1878~1950)이 지은 ‘서호사 중건기문’ 등의 편액이 걸려있다.

총취정 다섯 기둥에는 각각의 주련이 걸려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총취정 주련
만 가지 나무 가운데 있는 한 집은
월출산 서쪽 강가에 있는 정자로다
이웃에서 일가 간에 담소하고
위에 계신 영혼이 오르내리며
아름다운 강과 푸른 산이 근접하고
둥근달과 문장성이 떴다 잠겼다 하도다
萬木中間一屋
月山西畔湖亭
笑語連詹花樹
陟降在上精靈
呼吸江光岳綠
浮沈璧月文星

문곡 김수항의 ‘서호사 봄가을 두 정일의 축문’
행동은 향리에서 신임하였고
공로는 마을의 서당에 보존되었네
한 사우에서 향사를 받듦이
영원토록 싫어함이 없으리라

일향묘위(一享廟位) 서호사
구림마을 선비 구계 박이화(1739~1783)가 쓴 「낭호신사」에 “태호공 조선생(曺先生)은 일향묘위(一享廟位) 되야셔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보통의 경우 하나의 사당에서 여러 명의 성현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데 서호사에서는 오직 태호 조행립 한 분만을 모신다는 뜻이다. 함양 박씨 죽정서원은 오한공 박성건을 비롯하여 5위를 모시고 있고, 해주 최씨 동계사 역시 문헌공 최충을 비롯한 5위를 모시고 있는 것과 견주어 보면 박이화가 왜 ‘일향묘위’라는 표현을 했는지 이해가 간다.

또 조행립의 업적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해서 창녕 조씨 문중 차원이 아닌 구림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지은 사당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것은 태호공이 지역사회에 미친 공적과 영향이 그만큼 크고 울림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편, 총취정 내부 상단에 걸려 있는 ‘서호사 중건기문’에도 조행립이 향촌 사회에 미친 선한 영향력과 업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김영한의 ‘서호사 중건기문’
옛날에 향선생(鄕先生)이 몰(歿)하면 사(社)에서 제향을 받들었는데 영암의 서호사(西湖社)가 바로 이와 같은 경우이다. 첨지중추부사 태호 조공(曺公)이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로 알려졌었고, 관리로 있으면서는 순량(循良)으로 드러났는데, 인끈을 던지고 남쪽으로 돌아와서는 한결같이 남전 여씨의 향약을 준수하여 계(契)를 가다듬고 서숙(書塾 글방)을 설립하여 후진을 배양하니, 집집마다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는 소리가 넘쳐 나 고장에는 순진하고 소박한 기풍이 회복되어 공로와 은택이 다른 사람에게 미친 것이 깊었다.

그래서 서호사를 창건하여 제향을 받들며 만분의 하나라도 보답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 되었는지 중간에 그 사우(祠宇)가 훼철되었기에 식견이 있는 자들이 한탄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다가 세상의 도의가 날로 내려가고 풍속이 날마다 허물어지는데 이르자 이에 서로 논의하기를 ‘곤궁하게 되면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떳떳한 이치다. 어찌 고향의 현인을 도로 받들면서 서론을 강구하는 것만 같겠는가? 이것이 만회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이다’라고 여기며 마침내 돈을 갹출하고 재목을 모아 사우를 중건하고 나에게 기문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옛날 선조 문충공(김수항)이 공의 묘지명을 매우 상세히 지으셨는데 매번 선조의 문고를 읽을 적마다 공의 의로움을 사모하지 않는 적이 없었다. 대저 공로가 있는 분은 반드시 보답이 있어야 하니 오늘날에 옛날의 법도를 도로 거행하려는 것 또한 가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그 화려함만 숭상하고 그 실질을 없애는 것은 군자가 취하지 않는다. 당우(堂宇)가 이미 장대하고 미려하며 희생(犧牲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과 단술이 또한 살이 찌고 깨끗하니 사람들이 보고 듣는데 놀라고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만약 충성과 효도가 땅을 쓸어버린 듯 없어진 것이 그전과 같고 문학이 지리멸열하기가 그전과 같다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서호사를 중건하는 본래의 뜻이겠는가? 생각하건대 여러 군자께서는 갑절 더 노력하여 향리의 자제들을 앞장서서 인솔하여 이곳에서 강론하며, 갈고 쪼며 닦고 연마하여 집집마다 일제히 큰 선비가 되기를 힘쓴다면 선현의 혼령이 반드시 명명(冥冥)한 가운데에서 기뻐하실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공허한 형식일 뿐이니 어찌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명을 받든 사람은 그 후손 재연(在淵)인데 지난 일을 생각하여 나이가 많고 병이 들었다는 것으로 끝까지 사양하였다.<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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