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74]
■ 구림마을(83)

회사정에서 구림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태호 조행립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유물·유적을 만날 수 있다. 외삼문 취정(翠亭), 총취정, 서호사, 태호선생기념관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아직은 추운 날씨이지만 외삼문 입구에 매화와 수선화가 환하게 피어 답사객을 환영해주고 있다. 
회사정에서 구림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태호 조행립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유물·유적을 만날 수 있다. 외삼문 취정(翠亭), 총취정, 서호사, 태호선생기념관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아직은 추운 날씨이지만 외삼문 입구에 매화와 수선화가 환하게 피어 답사객을 환영해주고 있다. 

외삼문에 취정(翠亭)이란 편액을 걸어놓았는데 취정은 원래 조행립이 지은 정자 이름이다. 1793년에 제작된 영암읍지에는 “취정은 읍의 서쪽 20리에 있으며, 첨추 조행립이 지은 정자로 소나무 한 그루와 향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세한(歲寒)의 뜻을 취하여 이름을 취정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소실되고 없으며 정자의 원래 터도 찾지 못했다. 다만 「태호집」에 취정에 대한 시가 한 수 남아 있어서 정자의 풍취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시문에 의하면 정자 주변에 대나무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취정(翠亭)에서 짓다
그윽한 거처 적막하여 찾아오는 이 없고
정원의 북쪽과 남쪽에 대나무 장대 일만이네
인간 세상의 백년은 번개처럼 지나가는데
교룡 가죽으로 된 칼집의 칼 서릿발과 통하여 차갑네
장대한 마음은 있지만 노쇠하니 어디에 쓰겠으며
만년의 계책 생각하나 앉아 있는 것이 편안하네
바위 가에 조그마한 서재를 부지런히 쓸고 물뿌리니
괴상한 새가 가끔 다시 난간에 오른다오
 <출처: 태호집 485p>

창녕조씨 입향조, 조기서(曺麒瑞)
조행립의 부친 조기서(1556~1591)는 본관이 창녕(昌寧), 자는 인길(仁吉)이며, 증 예조 판서(贈禮曹判書) 창산군(昌山君) 조계은(曺繼殷)의 증손이고 별제를 지낸 조응경(曺應卿)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판관(判官)을 지낸 조세준(曺世俊)이고 어머니는 현령(縣令) 이숙(李淑)의 딸인 완산 이씨(完山李氏)이다. 
조기서의 7대조는 희천공 신충(信忠)으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의 의리를 지켜 영천으로 낙향하였다. 죽마고우이며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인 정승 하륜이 세 번에 걸쳐 입조를 권유했으나 조신충은 이를 끝까지 뿌리쳤다고 한다.(두문동실기 기록)
6대조인 충정공(忠貞公) 조상치(曺尙治)는 최만리 선생의 뒤를 이어 집현전 부제학에 이른 세종 때의 명신이다. 야은 길재 문하에서 수학했다. 세종 원년(1419)에 장원급제하여 방을 부르던 날 상왕으로 임석한 태종 이방원이 ‘네가 왕씨의 신하 조신충의 아들이냐?’고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 오고 있다. 그는 세종과 문종, 그리고 단종을 차례로 섬기며 명신이 되었는데 단종의 선위로 세조가 즉위하자 병을 핑계로 은퇴하였다. 고향으로 낙향한 후에는 평생 북향을 바라보며 앉지를 않았다고 한다.
조기서는 서울 후천동(현 서울 중구 필동) 남산 아래서 살았으며 이곳은 그의 아들인 태호 조행립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오윤겸(吳允謙 1559~1636)·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홍주(李弘胄 1562~1638) 등과 함께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선산임씨 월당 임구령 목사의 손녀이자 예조 정랑 임혼의 딸과 결혼했다. 이렇게 해서 구림마을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이항복의 도움으로 처가에 이거
조기서는 그 후 등과하여 의금부 도사로 제수되었는데 1589년(선조 22년)에 정여립의 난이 있었고 그와 관련된 자들을 국문하는 기축옥사가 있었다. 이때 국문하는 위관이 송강 정철이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는 1589년 10월,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에서 시작되어 약 3년간 정여립과 연루된 1천명의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은 피신하다가 죽도에서 자결하여 죽고 관련자로 지목을 받던 영남학파 조식의 문인 최영경이 구금 중에 옥사하자, 형신(刑訊)이 너무 잔혹하였다는 동인들의 거센 주장과 조기서의 스승인 우계 성혼이 정철을 조종하였다는 모함이 심하였다. 이에 조기서는 기호학파 서인 유생을 대표하여 정철의 무고함을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동인들의 배척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게 유벌(儒罰)이 가해질 것 같다는 은밀한 통정을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으로부터 받고 처가가 선산임씨 세거(世居)인 구림으로 왔다.
일년 후에 서인은 몰락했고 정철은 진주로 유배되었다. 동인이 정치적으로 득세하던 1591년 11월에 구림에서 졸하였다.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으나 그 재능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니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조기서의 묘갈문을 지었다.

태호 조행립
조행립(曺行立 1580∼1663)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백원(百源), 호는 태호(兌湖)이다. 별제 조응경(曺應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관 조세준(曺世俊)이고, 아버지는 도사 조기서(曺麒瑞)이며, 어머니는 선산임씨 임혼의 딸이다.
조행립은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외가가 있는 구림으로 어머니와 함께 피난을 오게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외선조의 묘가 있는 은적산 청룡동에 피신하였다가 형과 아우를 잃는 아픔을 겪었는데 이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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