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란 낱말 뜻은 무엇일까. 만일 영어로 플라워(flower)라고 번역해 버린다면 지천에 피어나는 잎과 대비되는 꽃으로 그 뜻이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큰 바람이 일 조짐으로 먼 산에 구름같이 끼는 보얀 기운을 바람꽃이라 일컫는데 이런 바람꽃에 이르면 꽃이란 낱말 뜻을 끝낼 수가 없다. 더구나 조선소 용접공의 등짝에 하나같이 피어나는 소금꽃에 이르면 더욱 멈출 수가 없고, 내 손등에 피어나는 저승꽃에 이르면 더더욱 스며들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내 유년 시절 하늘만 바라보고 흙에 코를 박고 살던 우리 부모는 월출산 천황봉에 피어오르는 바람꽃을 보고 질겁을 했다. 학파농장 소작인으로 살면서 절대로 잘못되면 안 되는 농사를 지어놨는데 큰 바람이 불어 망쳐버린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생각에 어린 나도 바람꽃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달 떠오르는 월출산에 무섭게 피어나는 바람꽃은 원망의 꽃이었고 저주의 꽃이었다. 바람꽃이 피고 뒤이어 휘몰아치는 비바람으로 우리가 살던 초가집은 지붕이 날라가고 애써 키운 농작물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그 누가 구름같이 끼는 보얀 기운을 바람꽃이라 했는가. 온 동네 라디오도 없던 시절 월출산에 피어나는 바람꽃은 태풍경보였다.
절대빈곤의 시절, 대부분 그렇게 살아냈지만 아버지 역시 이른 봄부터 초겨울까지 사방에 흩어진 다랑치 논과 손바닦만한 밭으로 신새벽부터 어둑한 저녁까지 움직였다. 나라에서 권장하는 특용작물을 해 돈을 만들고 그 돈으로 어떻게 하든 자식 농사만은 잘 지어보겠다고 몸부림을 친 것이다. 그래 끊임없는 농사일로 아버지 적삼은 항상 땀이 흥건했고 뒤이어 등짝에 하얀 소금꽃이 피어났다. 일용할 양식을 기다리는 해 긴 봄날에는 봄볕 한 짐 짊어진 아버지의 마른 이마에도 이따금씩 햇살과 바람 사이에서 소금꽃이 하얗게 피어나곤 했다. 난 그 소금꽃을 볼 때마다 외면했다. 당시 나는 아버지 이마에 피어나는 소금꽃으로 월사금을 마련하고, 아버지 등에 피어나는 소금꽃으로 꿈을 꾸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에 웃음마저 가난하면 아니 된다고 하며 우리들에게 항시 웃음을 선사했고 웃음꽃 피는 가정을 강조했다. 허기진 뱃속이라 물 한 모금이 아쉬운 속에서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도 웃음꽃은 시들면 아니 된다며 쥐어짠 생명수로 웃음꽃을 피워냈다. 지금도 그 누런 이를 드러내 놓고 하늘을 향해 맑게 웃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분명 꽃이었다.
내가 나이를 들어가자 아버지 얼굴에는 저승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버지 저승꽃은 마치 삼천 배 법당을 지키는 석등에 피어나는 석화와도 같았다. 희로애락이 빠져나간 인생의 허물 같은 것이었지만 파고 만장한 인생의 화폭에 화룡점정 한 후 피어나는 낙관 같은 꽃이기도 했다. 주름 깊은 얼굴에 다문다문 핀 저승꽃은 세월이 지나간 흔적이었다. 한번 피어난 저승꽃은 만장이 펄럭일 때야 비로소 진다는 것도 알았다. 아무나 겪지 못한 삶을 세상이란 용광로 속에서 부수고 갈고 녹이고 태워서 피워낸 당찬 꽃이다. 육신에 남은 한 방울의 물기마저 끌어올려 피워낸 저승꽃은 바라볼수록 서럽다. 황혼으로 물든 얼굴 곳곳에 핀 저승꽃은 남은 생을 오롯이 녹여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라는 명령이다. 저승꽃은 저승의 문턱에 다다라서야 흐드러지게 핀다. 세월의 물살에 떠밀려 찢기고 갈라지고 벗겨진 육신에 핀 거뭇거뭇해서 서럽고 서러워서 애달픈 꽃이다. 험하고 버거운 삶이 옹이가 되고 응어리저 일생 한번 피워 저승길에 가져가는 꽃, 주고 주고 또 주고 아낌없이 퍼주어 텅 비어 허깨비 되어 피워낸 인생의 승화같은 꽃이다. 인생 밤바다의 길잡이 등대 같았던 아버지의 저승꽃은 내가 철이 들어가자 더 많이 피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저승꽃이 만발한 채로 하늘로 갔다. 나는 하늘 가는 아버지께 이승에서의 마지막으로 꽃신을 신겼다. 아버지 가고 이십수 년이 흘렀다. 유년 시절부터 칠십 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험하고도 시리고도 아린 세월의 강을 건넜지만 난 아직 눈물의 강은 건너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를 향한 내 눈물이 마르면 아마 눈물꽃이 필 것이다. 이 나이 먹도록 생전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난 아직도 꽃속을 헤맨다. 평생을 꽃속에 살다 꽃신 신고 하늘 간 아버지 영전에 저승꽃 핀 이 아들이 눈부시게 하얀 눈물꽃을 바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