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69]
■ 구림마을(78)

구림리 동계사 앞에 세워진 고죽시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고죽기념관이고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동계사이다.
구림리 동계사 앞에 세워진 고죽시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고죽기념관이고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동계사이다.

삼당시인(三唐詩人) 고죽 최경창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고려 문헌공 최충(崔冲)의 19세손이며 아버지는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최수인(崔守仁)이다. 고죽은 외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최경창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그림, 악기 연주, 활쏘기 등 재주가 많았다. 

명종 7년(1552년)에 선산인 목사 임구령의 딸과 혼인하여 처가 동네인 구림에서 신혼생활을 하였다. 당시에는 결혼하면 처가살이하는 것이 사대부의 풍습이었다. 이때 청련 이후백(李後白)과 송천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옥봉 백광훈과 함께 수학했다.
1555년(명종 10) 17세 때에 을묘왜란 당시 왜구를 만났는데, 최경창이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퉁소를 잘 불었다고 한다.

1561년(명종 16) 23세 때부터 성균관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서 공부했고, 1568년(선조 1)에 증광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됐다. 

이때 고죽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다줄 홍랑(洪娘)을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다. 예조·병조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선조 8)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이 시기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게 되었는데 홍랑이 이 소식을 듣고 7일 밤낮을 걸어 고죽에게 와서 간병을 하였다. 당시에는 양계(兩界)의 금령이 있었고 인순대비의 국상이 끝난 직후라 이 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어 면직을 당했다.

1576년(선조 9) 건강이 회복되어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7년(선조 10) 영광군수로 부임하였다가 이듬해에 사직하고 귀향했으나 다음 해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했다. 1582년(선조 16) 4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별히 제수(除授)했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無辜)한 참소가 있었고 대간(臺諫)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 삼아서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고쳐 발령하였다. 최경창은 상경(上京) 도중에 종성 객관(客館)에서 졸하니 1583년(선조 16) 향년 45세였다.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李珥) · 송익필(宋翼弼) · 최립(崔岦)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서로 시를 주고받아 세인들이 팔문장(八文章)이라 칭했다. 

최경창은 특히 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 ·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송시풍(宋詩風)에서 당시풍(唐詩風)으로의 전환을 통해 우리 한문학사의 분기점을 이룩하는 데에 중심이 되었다. 숙종 때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강진(康津) 서봉서원(瑞峯書院)에 봉향(奉享) 되었다.

임구령 사위가 된 사연
다음은 구림마을에 전해오는 고죽 최경창의 혼인에 대한 이야기다. 임구령 목사의 중형인 석천 임억령이 먼저 고죽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조카사위로 점찍었다고 한다.

「조선의 삼당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고죽이 구림에 뿌리 내린 이야기 하나 할까요? 어릴 적 고죽은 나주에서 수학했어. 병조참의를 지낸 아버지(최수인)가 전라도 수사로 근무할 당시 나주 인근 선비들이 교유하던 장춘정에서 공부했는디, 이때가 대략 열 살 쯤이어. 그랑께 아버지가 정해준 곳에서 유학한 셈이지. 그런데 여그를 드나들던 석천 임억령의 눈에 들었어. 아무래도 똘똘한 서울 아이가 맘에 들었던 모양이어. 당시에 이미 당나라 시를 척척 외우고, 어른들과 시를 나누고 했은께. 그때 임억령은 고죽을 조카사위로 점찍었어. 구림에 사는 동생 임구령 목사가 고죽과 비슷한 연배의 딸이 있었거든. 그래서 임억령이 동생 임 목사에게 나주에 똘똘한 동자가 있으니 와서 보라고 얘기하고 임 목사를 나주로 불렀어. 그래갖고 하도 총명한 사윗감이 있다는 말에 임 목사가 나주로 달려왔어. 어린 고죽을 불러서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고 보니 욕심이 생긴 거라. 그래서 어린 고죽에게 바둑내기를 제안했어. 만약 고죽이 이기면 자기가 젤로 아끼는 것을 주겠다고 했어. 결과는 고죽이 졌어. 임 목사가 말하기를 “네가 이겼으면 내 딸을 주려고 했는데 안타깝다.”고 했어. 그러자 어린 고죽이 “제가 졌으니 대신 저를 드리겠습니다.”고 했어. 정정당당한 임 목사가 맘에 들어서 그의 사위가 되겠다고 자처한 것이지.
그런데 혼인을 하기로 한 해에 임구령이 광주 목사에서 파직을 당하는 일이 있었어. 그러자 모두 염려한 가운데도 고죽은 “한 번 약조한 것을 깰 수 없다.”며 구림에서 임 목사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된 거야. 그 정도로 곧은 절개의 사나이였어. 그때 나이가 열네 살이었는디, 그때부터 구림이 고죽의 본가가 된 거여.」 <출처: 영암문화원 열람 데이터베이스 영암설화 군서면 편>

고죽과 홍랑의 사랑 이야기
한편 고죽 최경창을 말할 때 항상 따라다니는 인물이 한 명 있으니 고죽이 북평사로 부임할 때 만났던 기생 홍랑이다. 부임 도중 홍원 관아에서 투숙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관기였던 홍랑을 만나게 되었고, 후에 홍랑은 고죽이 근무하는 임지까지 찾아왔다. 임기가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올 때 홍랑은 쌍성까지 배웅하고 돌아가다가 함관령에 이르러 날이 어두워지고 비가 심하게 내렸다. 홍랑은 고죽과의 헤어짐이 아쉬워 시조 한 수를 지어 고죽에게 보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이별시 ‘버들가지를 꺾으며’라는 제목의 시조이다.<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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