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68]
■ 구림마을(77)

고려의 서북경계는 최충이 서북병마사로 쌓은 평로성, 영원성, 유소가 쌓은 위원진, 하공진 장군이 파견되어 거란과의 국경을 감시한 안문(압록)이다. 

고려의 동북면은 고려사 지리지와 조선 세종실록에 잘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하얼빈 쌍성과 고려의 윤관 장군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을 섬멸한 후 공험진 선춘령에 구축한 동북 9성이다.

고려의 남쪽은 양자강 유역의 강남, 즉 남경이다. 대청광여도에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다. 상주현은 후백제 견훤의 고향이며, 금산사는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되었던 사찰이다. 낭산(狼山)은 신라 선덕여왕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최충의 고향 해주는 산동반도
고려 성종(981~997)부터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1046~1083)에 이르기까지 무려 6대에 걸쳐 공직을 수행한 최충(崔沖)은 인품과 학문이 뛰어나 당시 사람들로부터 ‘해동공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공자의 고향은 산동반도 곡부이며 지금도 그곳에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최충의 고향 해주(海州)는 산동반도에 있으며 대청광여도에는 ‘옛 동해군(古 東海郡)’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여 있다. 지도에서 보듯이 산동반도에는 동해, 북해, 대륙택, 발해 등의 거대한 호수가 있다. 이 호수들은 동정호와 마찬가지로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커서 진짜 바다처럼 보인다. 옛 중국인들은 내륙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우리처럼 바다를 보고 살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큰 강이나 호수, 하천을 말할 때 ‘해’(海)라고 불렀다. 옛 사서(史書)에 나오는 해(海)는 대부분 큰 호수나 황하, 양자강 등의 물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우리나라의 동해바다, 서해바다를 가르키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중원, 하남, 강남은 어디인가?
“성종(成宗)이 또 주·부·군·현 및 관(關)·역(驛)·강(江)·포(浦)의 명칭을 고쳤으며, 마침내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만들고, 12주(州)에 각각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다. 그 10도는 첫째는 관내(關內), 둘째는 중원(中原), 셋째는 하남(河南), 넷째는 강남(江南), 다섯째는 영남(嶺南), 여섯째는 영동(嶺東), 일곱째는 산남(山南), 여덟째는 해양(海陽), 아홉째는 삭방(朔方), 열 번째는 패서(浿西)이었다. 관할하는 주군(州郡)은 모두 580여 개였으니, 우리나라[東國] 지리(地理)의 융성함이 여기서 극치를 이루었다. 그 사방 경계[四履]는 서북은 당(唐) 이래로 압록(鴨綠)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다. 무릇 서북은 그 이르는 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섰다.”

현종(顯宗) 7년(1016년) 정월 하교(下敎)하기를, “강남(江南)의 군현(郡縣)은 지난해 흉년이 들어 민(民)이 많이 굶주리고 있으니, 소재 관청에서는 식량과 종자를 지급하여 농경(農耕)을 권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출처 : 고려사 현종 7년 1월>
고려사에는 강남에 대한 기사가 수백 건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한반도에는 강남이란 지역 명칭은 없었다. 고려시대 한반도는 고려의 변방에 불과했다. 

고려 현종이 피난 간 곳은 강남
“현종(顯宗)이 거란을 피해 남쪽으로 파천할 때, 하공진은 뒤따라가다가 도중에 알현하여 아뢰어 말하기를, ‘거란(契丹)은 본래 역적의 토벌을 명분으로 삼았고 지금 이미 강조를 체포하였으니, 만일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군대를 철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점을 쳐서 길한 괘(卦)를 얻었으므로 마침내 하공진과 고영기(高英起)에게 표문을 가지고 거란 진영으로 가도록 하였다. 하공진이 창화현(昌化縣)에 가서 표문을 낭장(郞將) 장민(張旻)·별장(別將) 정열(丁悅)에게 주니, (그들이) 앞서 거란 군영에 가서 말하기를, ‘국왕께서는 진실로 와서 뵙기를 원하셨으나, 다만 군사의 위세를 두려워하셨고, 또한 국내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강남(江南)으로 피난 가셨으므로 배신(陪臣) 하공진 등을 보내어 사유를 알리려 하였습니다. 하공진 등도 역시 두려워하여 감히 앞에 나오지 못하오니, 청하옵건대 속히 군사를 거두어 주소서.’라고 하였다. 장민 등이 미처 군영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거란의 선봉군이 이미 창화현까지 진군하였다. 하공진 등이 앞서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자 거란 측에서 묻기를, ‘국왕은 어디 계시냐?’라고 하니, (하공진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지금 강남(江南)으로 가고 계시는데, 계신 곳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또 (거란에서) 묻기를, ‘(강남이) 먼가? 가까운가?’라고 하니, (하공진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강남은 너무 멀어서 몇만 리인지 알 수 없다.’라고 하니, 추격하던 거란 군대가 돌아갔다.”<출처: 고려사 권별보기 권94 열전 권제7 제신(諸臣) 하공진>

고려 현종은 영암에 온 적이 없다
위의 고려사 내용에서 보듯이 거란이 왕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하공진이 ‘강남은 너무 멀어서 몇만 리인지 알 수 없다.’라고 하니, 추격하던 거란 군대가 돌아갔다. 즉, 거란은 현종을 추격하지 않고 그냥 순순히 물러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언급된 강남은 양자강 유역을 말한다. 이곳을 남경(南京)이라고 하며 고려는 남경에 엄청난 규모의 궁궐을 지었다. 남경에는 강도(江都), 진강부, 강화부가 있어서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고려 황제들은 수시로 남경을 순시하였고, 몽고의 침입 때는 이곳을 근거로 40년 동안이나 항쟁했다. 인천 앞에 있는 작은 강화도에서 몽골과 항쟁한 것이 아니다. 강화도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병사들한테 단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한데도 식민반도사관에 세뇌당한 연유로 엉뚱하게도 영암 시종 남해포까지 거란 군대가 현종을 잡으로 내려왔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사실처럼 자리잡고 있다. 거란은 현종을 추격한 적이 없다.

이제 다시 최충의 후손인 고죽 최경창의 발자취를 따라 구림마을 동계사로 발길을 옮긴다.<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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