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67]
■ 구림마을(76)
서북로병마사로 고려 서북경계 방어
해동공자로 알려진 최충은 1041년(정종 7)에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가 되어 영원진(寧遠鎭)과 평로진(平虜鎭)에 성을 쌓고 14개의 보루를 설치하고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에 올랐다. 사진에 <대청광여도>의 영원성과 평로성의 위치가 잘 표시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현재의 중국 산서성에 속한 지역이다. 고려의 영토가 얼마나 컸었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료이다.
시대별 강역 제대로 밝혀야
지난 호에 고려의 동북경계가 북만주 하얼빈 쌍성과 연해주에 인접한 공험진 선춘령에 이른다는 것을 고증했었다. 서북경계가 안문관 서쪽의 산서성에 이르고 동북경계가 북만주 하얼빈 쌍성과 연해주에 이른다면 고려의 황도는 그 중심인 북경(순천부)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한·중·일의 역사서와 고지도가 이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영암의 고대와 중세 역사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은 조선 유학자들의 사대사관과 일제가 조작한 식민반도사관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이 활약했던 대륙 중심의 역사 무대를 축소 왜곡하여 한반도 내로 한정시켰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여기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의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 한국사의 시대별 강역이 제대로 밝혀져야 향토사 역시 그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최충이 쌓은 평로성과 영원성 규모
고려사 정종 7년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정종(靖宗) 7년(1041)에 최충(崔冲)이 영원(寧遠)·평로(平虜) 두 진(鎭)에 성(城)을 쌓았다.
영원성(寧遠城)은 759칸이고, 보자(堡子)는 8곳으로, 구내(區內)의 금강수(金剛戍)는 42칸, 선위수(宣威戍)는 61칸, 선덕수(宣德戍)는 50칸, 장평수(長平戍)는 53칸, 정잠수(鼎岑戍)는 38칸, 진하수(鎭河戍)는 42칸, 철용수(鐵墉戍)는 61칸, 정안수(定安戍)는 32칸, 관성(關城)은 11,700칸이다.
평로성(平虜城)은 582칸이고, 보자는 6곳인데, 구내의 도융수(檮戎戍)는 36칸, 진흉수(鎭兇戍)는 30칸, 직잠수(直岑戍)는 41칸, 항마수(降魔戍)는 50칸, 절충수(折衝戍)는 30칸, 정융수(靜戎戍)는 30칸이고, 관성(關城)은 14,495칸이다.」
옛 선조들이 얼마나 기록을 철저하게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순천부는 북경인데 고려의 서북경계인 삭(朔)주, 평로, 위원, 위원, 안문 등지를 고려해볼 때 북경(순천부)은 최충이 살던 시대에 고려의 황도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한편, 거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안문과 위원진에 대해서도 고려사는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강동 6주로 유명한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하공진 장군 등의 행적도 잘 나타나 있다. 다행스럽게도 청나라가 제작한 대청광여도에 고려의 서북경계 지역이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어서 교차 검증할 수가 있다.
고려와 거란의 경계, 안문(雁門)
고려사 선종 5년(1088년)‘요에 사신을 보내 각장 설치 중단을 청하다’라는 기사를 보면 고려 장수 하공진을 안문에 파견하여 압록 강변을 감시하도록 하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에 배신(陪臣) 서희(徐熙)가 경계(境界)를 맡아 관할하고 있었고, 동경유수 소손녕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상의하여 각자가 양쪽 국경을 담당하여 여러 성을 나누어 쌓도록 하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공진(河拱辰)을 안문(鴈門)에 파견하여 압록(鴨綠)에서 구당사(勾當使)가 되도록 하고, 낮에는 나가서 동쪽 강변을 감시하고 밤에는 내성(內城)으로 들어와 머물게 하였습니다.」<출처: 고려사 世家 권제10 선종(宣宗) 5년 9월>
압록강은 안문에서 안평까지
안문(鴈門) 역시 고려의 서북경계에 속한 곳으로 압록강 상류 지역이다. 고려사 지리지 서문에서 정인지가 “고려의 서북은 당(唐)나라 이래로 압록(鴨綠)을 한계로 삼았다.”라고 했는데 평로, 영원, 안문(雁門) 근처에 있는 압록(鴨綠)강은 현재의 중국 ‘호타하’로 대청광여도에 표시되어 있다.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면 최충이 살았던 당시의 압록은 지금의 신의주 압록강이 될 수가 없으며 왕조가 바뀌면서 동쪽으로 지명 이동된 것을 알 수 있다. 요나라 때 현재의 요하(遼河)를 압록강이라 표기했다가 명나라를 거치면서 지금의 신의주 강을 압록강이라 했다. 현재 발견된 사료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지금 한국사 교과서 지도에 표시된 고려의 영토는 실제보다 현저하게 축소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다.
평로성 우측에 인접한 위원진
현종(顯宗) 20년(1029)에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 등을 보내어 흥화진(興化鎭) 서북쪽 40리에 있는 오래된 석성(石城)을 수축(修築)하고 위원진(威遠鎭)을 설치하여 성을 쌓았다. 825칸이고, 문(門)은 7개, 수구(水口)는 1개, 성두(城頭)는 12개, 차성(遮城)은 12개이다.
덕종(德宗) 2년(1033)에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방 경계에 처음으로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 서해 바닷가의 옛 국내성(國內城)의 경계로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위원(威遠)·흥화(興化)·정주(靜州)·영해(寧海)·영덕(寧德)·영삭(寧朔)·운주(雲州)·안수(安水)·청새(淸塞)·평로(平虜)·영원(寧遠)·정융(定戎)·맹주(孟州)·삭주(朔州) 등의 13개 성(城)을 거쳐 요덕(耀德)·정변(靜邊)·화주(和州) 등의 세 성(城)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니, 길이가 1,000여 리에 뻗었고,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와 두께가 각 25척(尺)이다.<출처:고려사 권82지 권 제36>
위의 기록을 보면 현재 중국이 자랑하는 만리장성은 1000년 전 고려 때 최충과 유소가 쌓은 천리장성을 둔갑시켜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북만주 하얼빈 쌍성총관부 몽고 관리로 있던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가 고려를 배신하고 조선을 건국하면서 대륙에 있던 고려의 본토를 모두 명 나라에게 상납한 후 우리의 강토는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만주 철령에서 흑룡강에 이르기까지의 영토를 보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특히 세종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조선의 영토는 동서 2천 리, 남북 4천 리로 기록되어 있다.<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글입니다. 올바른 고려사와 강역을 재정립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