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 자연유산이 살아 숨 쉬는
영암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자(2회)
자살을 미화한 일본인
일본인들은 자살은 최고의 충성을 표현하는 용감함의 극치로 사무라이 사회에서 각광받았다. 사무라이 사회는 충성심이라는 사회적인 결합과 유대가 가족적인 관계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많은 군기문학(軍記文學)에서는 자식을 죽여가면서까지 연대와 집단을 지킨 사람을, 가족의 정에 이끌려 연대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사람보다 훨씬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태평양전쟁 때 1기 1함의 결의를 다지고 목숨을 버린 자살특공대가 이처럼 자살을 천황폐하를 위하여 충성하는 것으로 미화하여 그의 혼령을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하였다. 무려 1천36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8.15까지 3개월에 걸친 전투에서 미군은 1만2천명이, 일본군은 6만5천명이 죽었는데 민간인이 22만 명이 죽었다. 여기에서 민간의 죽음에 대하여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본군은 미군의 손에 죽느니 천황폐하를 위해 우리 스스로 깨끗이 죽자는 ‘옥쇄’를 일반 주민에게 강요했다. 주민들은 주민이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이웃이 이웃을 살육해야 했다. 그것을 거부하면 학살당해야 했다(조정래, 정글만리 3권)
관용이 없는 일본인
에이미 추어(미국 예일대학 교수)는 그의 저서 ‘제국의 미래’에서 “관용이 사라진 순간 제국은 몰락한다”는 내용을 논지로 하고 있다. 그는 관용 여하에 따라 고대 로마 제국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근현대까지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제국들을 정확하게 진단하였다. 그는 서술에서 일본은 관용심이 없는 나라이다. 그래서 패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일본은 나치와 마찬가지로, 피정복민의 환심을 사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목적은 해당 지역의 자원들을 뽑아가고, 원주민들을 가장 위험하고 천한 일에 동원하고, 정복한 영토를 인구가 과밀한 일본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하는 데 있었다. 한국에서는 대대적인 강제노역이 실시되었다. 일본인들은 100만 명에 이르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징발해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심지어는 사할린이며, 일본으로까지 끌고 가서 건설 현장과 탄광 등의 고된 노동에 투입했다. 또한, 관리직에 채용한다는 약속을 내세워 수천 명의 한국의 여성들을 끌어다가 일본 병사들을 위한 위안부로 만들었다. 한국인들은 무거운 세금을 바쳐야 했고, 주요 식량인 쌀 대부분을 군량미 등으로 공출당하고 보리와 수수 및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다. 기아는 한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창씨개명을 하게 했고, 신사참배를 의무화했다고 지적하였다.
일본은 한국을 36년간 통치하면서 한국민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생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과도 없는 상태에서 80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는 그들의 옹졸함이요 관용심(寬容心)이 없는 국민성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일본은 세계제국이 될 수 없다는 에이미 추어 교수의 논지에 공감한다.
‘국화와 칼’로 본 일본인의 2중성
세계 제2차대전이 종말에 접어들자 미국 국무부는 1944년 6월 미국의 문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에게 문화적 관점에서 일본을 연구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다. 저자는 그의 저서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은 예의 바르며 온순하고 겸허하지만 거칠고 야만스러우며, 국화를 재배하는 일에 심취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추구하길 좋아하지만 무사도와 칼의 명예에도 집착한다”고 지적하였다.
국화는 본래 만세일계(萬歲一系)라 불리는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꽃이고, 칼은 일본 사무라이 계층과 그 정신적 지주인 무사도의 상징이다. 이런 모순된 성향은 개인이나 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본인의 피에 보편적으로 흐르는 공통된 민족성임은 틀림없다.
‘국화와 칼’은 1946년 완성된 책으로 일본 민족문화를 알 수 있는 고전(古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의 출간 배경을 보면, 미국은 지금까지 전쟁을 해왔던 여러 나라 중 일본만큼 곤혹스러운 상대는 없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세계 제2차 대전에서 일본을 이기려면 섬 상륙작전이나 후방 보급로 확보도 중요 하지만 일본인의 특성 파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44년 무렵 미국은 전쟁에서 연승을 거두며 일본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승리가 임박해오자 미국은 일본 본토를 공격하지 않고서도 일본을 투항시킬 방책에 대하여 고심하였다. 미군이 일본에 상륙했을 때 목숨을 걸고 저항을 하면 막대한 전력손실이 우려되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점령하고 나서는 어떤 방식으로 일본 사회를 바꿔가야 하는가와 천황제도는 계속 유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깊게 고심하였다.
베네딕트는 미국과 일본이 교전 중인 상황에서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연구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그가 직접 일본에 가서 그들의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판별해낼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 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 정부는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계 미국인 11만 명을 중서부에 있는 집단 수용소 10여 곳으로 보내 격리했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풀어주었다. 이들 일본계 미국인들이 루스 베네딕트의 일본연구를 위한 정보제공자들이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
이어령 교수는 그의 저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일본은 축소지향일 때 흥하고, 확대지향일 때 졸렬성을 가져온다”고 지적하였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요시무라 데이치는 1982년 2월 21일 자 일본의 선데이 마이니치 ‘스코프’ 칼럼에서, 이어령 교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저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한국인 이어령 교수는 우리나라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恨)의 문화론’이라는 한국문화론이 일본어로 소개된 것뿐이다. 정치를 넘어선 내용이며 남이 따를 수 없는 분석의 정확성과 이야기 솜씨로, 드물게 보는 명저이며 영역과 중국어 번역서도 나와 있는데, 한국인의 마음 밑바닥까지 살펴낸 명저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선 그 내용의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극히 반응이 적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본인의 마음 구석구석까지 밝게 조명하는 저서라서 사정이 다르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쳐내는 놀라움이 있다. 이어령의 학설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그 경고에도,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귀를 잘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조그맣게, 보다 더 순수하게, 보다 더 본질적으로 심화되어 가는 민족성이 세계시장에 용비하는 뛰어난 소질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축소로 향할 때는 독특한 강렬함을 발휘하지만 축소가 극진해 확대로 향하게 되면, 의외로 졸렬성과 취약성을 드러낸다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통일에는 천재적인 수완을 보이면서도, 외국에 군대를 보내면 좌절한다. 태평양전쟁도 희한한 전과를 거두어, 인도네시아로부터 뉴기니아, 버마까지 뻗어 나갔다. 그러나 그 전과를 확보할 수가 없었다. 한번 승리를 거두면서 전법이 적에게 알려져 의표를 찔려 패배하게 되어도 그 전법을 바꾸지 못했다. 일본의 위기는 축소로 성공을 거두고는 막상 확대로 향해야 할 때는 패배하는 운명을 되풀이해 왔다고 했다. 그런데도 오늘의 일본은 지극히 졸렬한 방법으로 영광의 고갯마루 턱을 오르려 하고 있다.
6.25 한국전쟁에서나 월남전쟁에서 청년들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나라가 일본이다. 그 전쟁 덕으로 제일 돈벌이를 많이 한 것도 일본이었다. 그런데도 피난민을 받아들이지 않고 난민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는 것도 일본이다. 그래서 국제적 비난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동차, 시계, 카메라··· 그 생산의 질에 있어서나 양에 있어서나 세계에 자랑하던 나라가 ‘메이드 인 재팬’이기 때문에 망가지거나 무너진 나라가 많다. 그러나 일본인은 ‘이제까지 최고품보다 질이 좋고 값싼 물품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자유경쟁의 세계에 거리낄 게 뭐냐’ 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축소로 향하는 국내만의 생각이다. 밖에는 실직과 빈곤화로 원한을 품고 울고 있다. 일본인은 무엇 때문에 돈을 버는가. 인정도 용서도 없는 민족인가. 무역 마찰이 더욱더 격심해지는데, 그 해결은 현재의 일본 논법 속에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도 나는 이 책이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읽힐 것을 희망한다.
맺는말
본서를 집필하기까지 자료를 수집하는데 관계자들의 노고를 다시 치하한다. 영암인의 독립운동사는 영암인의 시야만으로 집필하여서는 안된다. 시야를 넓혀 세계 속의 한국, 한국 속의 영암을 생각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글은 기승전결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글이 산만하여 저자가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어렵다. 본서가 많은 자료를 토대로 발간되었으므로 이를 토대로 전정 판을 내면 훌륭한 작품이 될 것이다.
책은 공명심에서 출간해서는 안된다. 한번 출간하면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전승되기 때문에 집필자는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세계적인 문호 헤밍웨이는 ‘바다와 노인을’ 출간하기까지 500번을 수정했다는 일화가 구전되고 있으며, 세계적인 석학 앨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12년이 걸렸다. 우리나라 MBC 워싱턴 특파원을 역임한 김택곤은 ‘미국의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를 출간하기까지 20년의 세월을 투입하여 자료를 수집하면서 걸작을 출산하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철광을 뽑아내는 용광로와 같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봐야 한다.
필자가 영암의 근현대사를 연구하던 초기에 영암 현지에서는 자료를 구할 수 없었다. 단지, 구한말 영암 의병활동 분야의 글을 찾아서 검토한 결과 논자가 공명심에서 픽션화 해버려 이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영암 군지’의 경우에도 동학농민혁명이 없고 항일운동이며 6.25 한국전쟁에 대한 체계적인 내용이 없어 허탈감이 생길 정도였다. 영암의 역사 및 문화와 관련한 전문가를 영암군 차원에서 양성해야 한다. 이는 영암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요, 현역에서 은퇴한 영암인들의 할 거리를 제공해주는 다목적 적인 일이기도 하다.
<끝>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