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 자연유산이 살아 숨 쉬는
영암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자(2회)
우리는 일본에 지배당했던 과거의 괴로웠던 이야기는 잘 알면서도 우리를 괴롭혔던 일본인 그들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고 있다. 척박한 땅 일본열도는 세계에서 가장 심한 자연재앙이 끊임없이 돌발하는 곳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일본인들은 토속신앙(土俗信仰)에 의지해야 하였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일본인 특유의 국민성이 형성되었고, 억지 역사 논리를 개발, 이웃 나라를 침략하여 고통을 주었다. 여기에 그들의 정체(正體)를 확인할 이유가 있다.
토속신앙으로 본 일본인
일본은 섬나라 척박한 땅에서, 이에 가중하여 지구상의 여러 나라 중에서 자연재앙이 가장 많은 나라, 지진과 태풍, 폭우와 쓰나미로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진을 보면, 진도 1도짜리까지 포함하면 1년에 무려 1천500번으로, 일본에서 거주하면 지진 공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1923년 7.9의 간동 대지진으로 14만 명이 죽었으며,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6천여 명에 달하는 한국인을 학살했다.
이뿐만 아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부지역 미야기현 앞바다에서 리히터 규모 9.0에 해당하는 일본 역사상 최악의 지진으로 최대높이 15m의 쓰나미가 발생, 일본 동북부의 해안을 초토화하면서 2만8천명이 죽어갔다. 태풍의 경우, 한해에 동남아시아의 태평양 상공에서 발생하는 태풍 수가 평균 27개 정도인데, 11개 정도의 태풍이 일본을 스치고 지나간다. 폭우로 인한 홍수피해를 보면, 1967년 8월 26일 후쿠시마 등 3개 현에 500mm의 폭우가 내려 사망자 113명, 행불자 33명, 부상자 1980명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자연재앙에서 일본인들은 무기력하고 하루하루를 살아있다는 자체가 신의 보살핌으로 생각하면서 토속신앙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에겐 바람이 이는 나뭇잎, 물결치는 보리 이삭마다 영혼이 깃들어있고, 굴러다니는 돌멩이에도 숨이 붙어있다. 수풀과 호수마다 정령이 살았고, 대지는 어머니였다. 그런 일본은 태양의 신 아미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는 물론 모든 잡다한 토속신들까지 섬기는 풍습이 체질화되었다. 이러한 신들을 야스쿠니 신사에서부터 전국 곳곳에 10만 개소에 이르는 신사를 만들어 토속신을 모시는 국민이 ‘신들의 나라’ 일본인이다.
인류학으로 본 일본인
인류학적인 면에서 일본인은 과연 그 조상이 누구인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자기들이 야마토(大和族)으로 우수민족임을 자랑하며, 우리 조선인을 미개 민족으로 비하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일본학계 등의 조사·연구결과에 의하면, 일본 국민의 90% 이상이 한반도 도래인(渡來人)으로 밝혀졌다. 일본 국립유전자협회는 ‘일본인의 기원’이라는 코너를 통해 “일본 본토에는 일본인이 없다”는 호우라이 사토시 박사의 연구자료를 일본인의 유래를 알 수 있는 가장 근거 있는 자료로 공식 채택하고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일본 본토에는 순수 일본인의 DNA를 가지고 있는 비율이 4.8%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4.8%에 해당하는 종족이 아이누족, 죠몬인, 류쿠인이다.
오사카 대학의 고하마 모토츠쿠 교수는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일본의 모든 마을을 대상으로 5만6천여 명의 두개골 형태를 조사한 결과 현대 일본인의 원류가 아이누인(조몬인의 후예)과 한반도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도쿄 대학의 하니하라 가오즈 교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일본인은 조몬인 직계자손과 한반도 이주민의 통계비율이 1대9.6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일본인의 뿌리는 한국”이라고 단정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 도래인들은 일본의 야요이시대를 열고, 야마토 시대를 일구었으며, 아소카 문화를 꽃피어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념할 것은 일제의 식민지정책이 1919년 3월 1일 이후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일본열도의 한반도 도래인을 내세워 내선일체(內鮮一體)니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내세워 이 정책 방향에 가장 적합한 대상으로 고대 인물인 왕인박사가 식민통치 시기에 소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본 일본
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사회에 내려오는 ‘권력의 편중’을 지적하며 윗사람에 대한 비굴함과 아랫사람에 대한 오만함에서 일본 사회의 병폐를 찾았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을 근대화시킨 상징적 인물로, 일본의 최고액권 지폐 1만 엔짜리에 색인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학문의 권유’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명언을 남긴 인물이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지적한 일본인의 병폐는 일본인이 일본인을 평한 너무도 합당한 표현이다. 일본인은 자기 내국인들 관계에서 만이 아니다. 국제관계에서도 자신들보다 강한 나라, 강한 국민에 대하여는 굴종적인가 하면, 약한 국가 약한 국민에 대하여는 더없이 오만한 태도로 대한다. 이처럼 2중성이 극명한 국민이 일본 국민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에게 조선인은 더럽고 불결한 미개국가 야만인이었다. 야만인이기에 죽임을 당했고 어린 소녀들이 성노예로 끌려가는 통한의 아픔과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일본은 대한민국을 포함한 피해 당사국 인접 국가에 대하여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았으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관용(tolerance)이 없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에이미 추아가 지적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인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4~1901)는 1834년 규수 나카쓰 번의 하급 무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세습적 신분질서가 지속되고 있는 사회체제에서는 하급신분에 속한 자신과 같은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상위계층으로 신분 이동을 할 수 없음을 통감, 유교와 유교 사상이 국가발전을 저해한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개혁하기 위한 계몽사상가로, 계몽운동가로 평생 활동하여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후쿠자와는 양이(洋夷) 파들이 서양세력을 배격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양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이며 일본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로 보았다.
그는 처음 난학(蘭學 네덜란드 학문)을 했으나 영어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이에 전념하여 영어에 능통하였다. 그는 명치유신이 일어날 때 33세로 1860년대 중반에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막부의 해외 사절단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후에도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유럽의 선진문물을 체험, 귀국하여 ‘서양사정’(西洋事情), ‘학문의 권유’ 등 평생 22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남녀평등과 일부일처제를 주창했다.
그는 19세기 중반이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언론인이요 교육자였다. 후쿠자와는 ‘서양사정’ 등 자신의 저서가 당시 350여만 부가 팔렸는데 이 수입으로 경응의숙(慶應義塾 경응대학 전신)을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우리나라의 해외유학 1호인 개화파 유길준이 경응의숙에서 유학하였고, 김옥균 등 갑신정변의 주도 인물들이 후쿠자와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그는 “정치 경제 사상 문화 등 전 분야에서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을 따르자”라는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하여 제국주의와 일본 우익의 뿌리로 평가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탈아론은 임나일본부설과 함께 정한론의 이론적 배경으로, 한반도 침략을 합리화시키는 이론이 되었다. <계속>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