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의 실천에 앞장서온 종교 지도자유신헌법 철폐 반독재 투쟁…고단한 삶지역발전 후원, 영암의 정신적 지주 역할

전형적인 유교집안에서 성장
사회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종교 지도자로 평생을 살아온 이서하 원로목사.
영암읍교회에서만 31년간 봉직해온 그는 종교 지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영암의 정신적 지주로서 아직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고흥군 금산면 명천리에서 태어난 그는 유교사상이 뿌리 깊게 박힌 부모님 밑에서 5~6세 때 이미 천자문을 떼고, 초·중학교까지 명심보감,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을 두루 섭렵하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엄격한 집안에서 철저한 유교사상을 접하며 성장한 그는 당시 마을에 있는 교회에도 나가 성경구절을 배우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당시 마을교회는 평양신학대학을 나와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일제에 항거하다 6년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던 오석주 목사가 신학대학 재학 중 세운 교회로 그의 집은 소작농을 거느릴 정도로 부농이었다.
해방이 되던 해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극도의 사회혼란으로 부모님이 중학교 진학을 만류하는 바람에 1년을 쉬었다가 종교재단인 순천 매산중학교에 진학했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유학을 하게 된 그는 많은 사회과학 서적을 접하며 세상사는 일에 눈을 뜨게 됐다.
어려서 한학을 배우며 동양철학을 체득한 그에게 사회과학 서적을 비롯한 소크라테스, 헤겔 등이 주창한 서양철학은 그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잊을 수 없는 여순반란사건
그런데 중학교 시절에 맞은 여순반란사건은 그의 일생일대에 가장 큰 시련과 함께 목회자로 들어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교에 갔다가 무기한 휴교 소식을 접한 그는 미처 고향으로 돌아갈 틈도 없이 이미 순천경찰서를 유린하고 순천시내를 장악한 반란군이 곳곳에 적기(赤旗)를 내걸고 공산주의사상에 감염된 남녀학생과 군인·경찰·우익인사·지방유지·일반시민을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인민재판에 넘긴 다음 무자비한 만행을 저지르는 모습을 목격했다.
당시 여수와 순천일대는 방화와 약탈, 파괴와 살인의 생지옥으로 돌변, 어린 그에게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이 같은 극도의 혼란 속에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르고 경찰서에 붙잡혀 간 그에게 가혹한 시련이 닥쳤다. 사상 불순자로 지목한 경찰이 한달간 감옥에 가두고 무수한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 나중에는 사형선고까지 내려졌다.
동서양 철학을 두루 섭렵하고 일찍이 사회에 눈을 뜬 그에게 좌경화된 학생으로 비춰지지 않았나 추측될 뿐, 잡혀 갈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밤낮으로 당한 고문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절박한 상황에 처한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살려만 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하나님께 간청한 것이다. 살려만 주면, 남은 인생은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노라는 다짐도 했다. 그러자 마음의 평온이 찾아왔다.
그 후 군부대 고급장교로 있던 처가식구의 도움으로 왜곡된 사실이 밝혀져 생지옥을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혼란기를 거치며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지만 가정 형편상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되었다. 고민 끝에 공무원으로 취직하여 야간에 대학에 다니기로 결심했다. 당시 보통고시에 합격하면 4급 공무원에 임용될 수 있었다. 다행히 시험에 합격, 보건사회부에 발령을 받았다. 보직은 대구의 국립삼육중학교에서 교사 및 관리직을 맡게 되었다. 전국의 나환자 자녀들이 집단 수용되어 중학교 과정을 교육받던 이 학교는 그에게 또 다른 경험을 갖게 했다. 그는 이곳에 근무하면서 야간에는 청구대학 국문학과를 다녔다.
신학대학에 다시 진학, 목회자로 나서
그렇게 한참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는 동안 그의 마음 한쪽구석에는 여순반란사건 때가 항상 떠올랐다. 죽음에 맞서 살려달라는 기도를 했던 그때를 생각하면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반문을 하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결국 그는 어느 날, 부흥집회에 다녀온 뒤 결단을 내렸다. 5년간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신학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신학대학에 들어갔지만 자신이 없었다. 평생 험난한 성직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졸업 후에도 목사고시에 합격했지만 좀처럼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그동안 아홉 번의 이력서를 내고 취직을 하려 했지만 공교롭게도 모두가 허사였다. 성직자의 길을 걷도록 하나님이 막아서고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면서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소개를 받아 해남 문내면의 오지 교회에 첫 부임했다. 그곳에서 채소와 돼지·닭 등을 키우며 목회자로서 열심히 활동을 했다. 3년간 심혈을 기울인 결과 꺼져가던 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그리고 결혼 7년 동안 자식이 없던 그에게 득남의 축복이 내려졌다. 이듬해도 아들이 생기더니 2년 후 또다시 연년생으로 아들을 낳는 경사가 이뤄졌다. 그 넷의 아들은 모두 장성하여 첫째와 둘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자로 나섰고, 셋째와 넷째는 공인회계사와 삼성전자 사원으로 각각 활동하고 있다.
이후 마산면으로 옮겨간 그는 골치를 앓던 복평·장성·상등교회를 단일화하여 삼일교회를 세우고 1년여 만에 영암으로 건너와 영암교회 중흥에 나서게 된다. 특히 유신헌법 철폐와 반독재투쟁에 나섰던 그는 함석헌 장준하 문익환 강원용 목사 등 교계 지도자들과 인권운동에 나서 행동하는 양심으로 또 한번의 수난시대를 겪는다. 그가 움직이는 곳엔 어김없이 사찰요원이 배치되는 박해의 생활이 계속됐지만 투쟁적 삶은 중단할 수 없었다. 사회구원운동이 곧 개개인의 영혼구원과 같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러한 그의 삶도 차츰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평화통일운동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고 2002년 정년을 맞아 현역에서 은퇴했다.
한때는 지명수배령이 내려지고 사찰대상으로 자유스럽지 못한 몸이었지만, 몸담고 있는 교회와 지역사회의 발전에도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함으로써 아직도 그는 영암지역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남아 있다. /문 배 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