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60]
■ 구림마을(69)
간죽정을 건립한 오한 박성건
박성건(朴成乾 1414~1487)은 조선 전기 문인으로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자는 양종(陽宗), 호는 오한(五恨)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계원(朴季元), 할아버지는 박사경(朴思敬), 아버지는 박언(朴彦)이다. 박권(朴權)은 그의 장남이다. 구암 임호와 함께 구림 대동계를 창시한 박규정이 그의 조카이다.
박성건은 1453년(단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1472년(성종 3)에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 5위로 급제하였다. 금성교수, 소격서령, 장수현감을 지냈다. 후진 양성에 뜻을 두어 관직을 버리고 영암의 구림마을에 터를 잡은 뒤 간죽정(間竹亭)을 짓고 학문을 벗 삼아 지냈다. 그는 이 정자에서 인근의 시골 선비들을 교육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함양박씨세보’(咸陽朴氏世譜)에 박성건이 1480년(성종 11)에 지은 경기체가 ‘금성 별곡’(錦城別曲)」이 실려 있다. 총 6장으로 구성된 금성 별곡은 박성건이 금성(현 나주시)에서 가르친 제자 10명의 소과 합격 소식을 들은 뒤의 감격, 금성의 빼어난 풍광과 인물들, 향교에서 유생들이 공부하는 모습 등을 담고 있다.
그의 사후 194년(1681년, 숙종 8년)에 고향 선비들이 도갑리 죽정마을에 죽정사를 세워 춘추로 제향을 받들게 하고 순조 때는 사액을 받기도 했다. 죽정서원은 현재 간죽정 곁에 자리하고 있다.
한편 1899년 대사헌을 역임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간죽정을 방문하고 중수기를 남겼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인물이다. 그가 중수기를 쓴 당시에는 간죽정 주변에 대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음이 기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런 풍경을 찾아볼 수가 없다. 대나무숲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었다가 지금은 한옥단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송병선이 쓴 간죽정 중수기
간죽정은 낭주의 구림에 있으니 오한 박성건이 지은 정자다. 서호가 마주하고 월출산이 삼키려는 듯하며, 그 곁에는 물이 모여 못을 이루고, 곁에는 냇물이 소리 내며 흐른다. 어지럽게 꽃들이 피어 있고, 푸른 숲이 우거져서 뒤엉킨 채 햇빛을 가리고 있다. 사면은 빽빽한 대숲으로 둘러 있다. 대나무는 군자와 같은 점이 있으니, 그 절개를 보면 늠연(凜然)하게 외로이 서 있어서 그건 이른바 사어(史魚)가 화살처럼 곧았음이 아닐는지, 그 내부를 보면 탁 트인 채 비어 있으니 그건 이른바 안자(顔子)의 있어도 없는 것처럼 하던 것이 아닐는지, 이 때문에 군자들이 대부분 대나무를 사랑했다. 더구나 이곳은 십만 장부(丈夫) 같은 굳고 밋밋한 대나무들이 빽빽이 진을 친 듯이 둘러서서 모시고 있는 것임에랴, 이러한 사이에 정자를 세웠음은 당연하다...(후략)
박성건의 제간죽정(3수)
동쪽으로 죽정에 눕고 서쪽에 배를 띄어
남쪽 시내에 발을 씻고 북쪽 동산에 노니네
평생에 호탕하여 얽매이지 않은 뜻은
동서남북에 멋대로 다녔었네
밋밋한 대나무 총총이 서서 실바람 불고
댓잎 뜬 술동이 앞에 홀로서 술잔 드네
술에 취해 죽부인 안고 함께 꿈을 꾸노니
사랑이 병이 되어 고질로 드네
한가한 틈을 내어 서쪽 강 아래 낚싯대 드리고 앉았노니
팔팔 뛰는 물고기 옥 비늘로 푸르더라
뜻에 맞게 보낸 평생 귀함을 위해 다루지 않고
온종일 홍진(紅塵)으로 달리는 것 비웃노라
*홍진(紅塵)-번거롭고 속된 세상
박성건의 취중작(2수)
자세히 인간사를 생각해 보니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은 같은 것이었네
근심 깊어 이길 수 없으니
할 거라고는 이기는 방패와 창을 만들어야지
세 잔술 다 기울여 오래도록 취해보니
만천의 근심과 한 이제야 잊혀지네
적성산의 신선을 만나게 되면
신선법 묻지 않고 술 먹은 법 물으려네
<참고문헌: 호남명촌 구림>
오한 박성건의 시문을 보면 그가 속세의 명리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품성을 지닌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구림마을 간죽정에서의 삶은 ‘귀거래사’로 유명한 도연명의 은둔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 그는 ‘금성별곡’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경기체가(景幾體歌)의 하나로 한림별곡, 관동별곡과 더불어 국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