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59]
■ 구림마을(68)
구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간죽정
간죽정(間竹亭)은 죽림정에서 군서천을 따라 북쪽으로 약 100여 m를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이름 그대로 옛날에는 주변에 대나무가 무성했으나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나무숲이 개간되어 밭으로 이용되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 한옥단지로 변했다.
월출산 도갑사에서 발원한 계곡물이 하천을 따라 구불구불 흘러오다가 동계리 모래톱을 지나면서 긴 호흡으로 굽이쳐 흐르는 지점에 간죽정이 자리를 잡았다. 간죽정 마루에 앉아 고개를 들면 월출산 노적봉과 성기산 죽순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간죽정 오른편에는 죽정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기둥 안쪽에는 주련이 걸려 있으며, 내부 상단에 간죽정기 편액이 걸려 있다. 기문은 재사당(再思堂) 이원(李黿)이 썼다.
박성건의 아들 박권의 벗 이원
이원(?~1504)은 사육신 박팽년의 외손자로 조선 중기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낭옹, 호는 재사당이다. 1480년에 진사가 되고, 1489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가 후에 호조좌랑을 거쳐 봉상시에 재직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로 곽산에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다시 나주로 이배되었다. 그러다가 1504년 갑자사화로 참형 당했다. 중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박권(朴權 1465~1506)은 간죽정을 세운 박성건의 아들로 자(字)가 이경(而經)이다. 1492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은 정언(正言)에 이르렀다. 절친한 이원과 함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때 화를 당했다. 갑자사화 때 해남으로 유배되었는데 이때 <간죽정기>를 쓴 이원은 참형을 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접한 박권은 그 슬픔과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2년 후에 병사하고 말았다.
간죽정기는 이원이 1502년 나주로 유배되었을 때 친구인 박이경(박권)의 부탁을 받고 쓴 기문이다.
이원이 쓴 간죽정기(間竹亭記)
귀양살이 중에 병을 앓느라 오랫동안 붓을 들지 못하였다. 하루는 나의 벗 박이경(오한 박성건의 아들) 원님이 나에게 손수 쓴 편지를 보내왔다.
“나의 선인께서 거처하던 집이 영암현 서쪽 이십 리쯤에 있네. 앞에는 덕진의 넘실대는 소주가 있고, 뒤에는 월출의 기이한 봉우리들이 둘러 있으며, 중간에 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네. 물의 근원은 도갑사의 골짜기에서 나오고 있네. 구슬처럼 뛰는 물결은 여울을 이루고, 고이고 쌓이던 곳은 못이 되어, 돌고 돌아 일백 구비나 꺾이어 길게 흘러 서쪽으로 가고 있네. 또 월출산의 북쪽으로 나온 기슭이 길게 연결되어 봉우리들이 모여 주먹처럼, 사마귀처럼 집의 동쪽 모퉁이에 솟아 있네. 정자는 대나무 사이에 있으며 대나무는 소나무 사이에 있으니 우러러보면 천기가 저절로 움직이며, 굽어보면 연못에 노는 고기들을 셀 수 있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신승 도선의 옛터라고 한다네.
선인이 있어 여기에 살으셨네. 가시덤불과 우거진 대나무 등을 베어내고, 그곳의 옛터를 넓혀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간죽정’이라 하였으며 호를 오한거사라 하였네. 정자에서 시를 읊으며, 장차 세상을 마치려던 뜻이 있었네. 뒤늦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을 좋아하지 않아 폭건을 쓰고 남쪽으로 돌아와 자기의 뜻대로 사셨네. 그렇게 하다가 오래지 않아 선인이 세상을 버렸으며 정자도 또 따라서 훼손되었으니 오호 슬프도다.
내 또한 과거에 마음을 두었기에 이 정자를 수리하는 여가가 없었으며, 무오년(1498년, 연산 4년)에 나라에 죄를 지어 하경도로 유배되었으니 홀로 계신 어머님의 외로움을 누가 위문하였으랴. 다행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전리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계시던 곳은 옛 그대로이고, 어머니 모습은 변하지 않았네. 고향의 집을 돌아다보니 선인의 손길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네. 애모의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네.
더구나 이 정자는 선인이 손수 지었으며, 아침과 저녁으로 시를 읊던 곳이고 보면 그분의 손길이 남아 있으니 상재에 비하여 만배일 뿐이겠는가. 내가 이제 옛터를 새롭게 하여 뒷날까지 오래도록 전하게 하여 선인의 뜻을 따르고자 하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그 앞뒤 사실을 자세하게 적어서 애모의 정을 기록해 주지 않으려는가”
그래서 나는 단정히 앉아 편지를 펴보고 눈물이 흐르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두세 번이나 읽었다. 슬프다. 궁색스럽거나 영달하는 일이야 운명에 달렸으며 부와 귀는 하늘에 있다. 사람들이 출세하고 출세하지 못함은 시운이며 도를 닦느냐, 닦지 못하느냐는 자기에게 달려있다. 이런 이유로 군자는 저쪽에 있는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에 있는 덕성을 구하며, 하늘에 있는 부귀를 구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성명을 다해야 한다. 궁색스럽거나 영달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며 부귀로써 자신의 지조를 두 가지로 하지 않는다. 저들이 벼슬한다면 나는 나의 인(仁)으로써 대하고 저들이 부하게 되면 나는 나의 의(義)로써 대하니 내가 왜 저들에게 부끄러워하랴. 자신의 마음을 다할 뿐이다.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높은 벼슬을 진흙처럼 여기며 산수를 즐기는 마음을 완전히 지니고, 인지의 지혜를 발휘하였다. 동정이 기틀을 온전히 해야 하며, 모든 조화의 근원에 통달하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면서 한 세상의 복판에서 소요한다면 이런 것들을 궁색스럽다고 하겠는가, 아니면 영달했다고 하겠는가.<출처:호남명촌 구림 167~170쪽/구림지편찬위원회/1995>
<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