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57]
■ 구림마을(66)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후 1년 만인 1592년 4월 12일에 거북선을 제작 완료하여 시험항해에 성공했다. 다음날인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5월 초 1차 출전하여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에서 승리했고, 6월 초에 2차 출전하여 사천, 당항포, 율포 해전에서 승리했으며, 7월 한산도대첩과 9월 부산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전쟁 중임에도 이순신 장군은 현씨 가문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장군이 남긴 7통의 서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순신 장군과 현씨 집안과의 신의와 우정이 얼마나 돈독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전쟁 중에도 현씨 집안은 물심양면으로 장군을 돕는다. 장군은 그에 대한 답례로 정성스럽게 감사의 편지를 전한다. 대한민국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다. 이러한 감동적인 일들이 구림마을 죽림정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현씨 가문뿐만 아니라 우리 영암인들 모두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다.
5.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서신(1593년 7월 16일)
이 편지에서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유명한 문구가 나온다. (같은 해 2월 이순신 장군은 웅포 해전에서 승리하고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현지평(사헌부 정오품 벼슬) 정안 회납
임금님의 옥체가 건강이 아주 회복되셨다니 신민으로서의 경사스러운 일은 즐겁고 경축함을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이리저리 유리 파산한 나머지 기리는 정이 간절하든 차에 문득 하인이 와서 이달 초순에 보낸 편지를 받아 보니 위로가 되고 마음이 시원한 것이 보통 때보다 더 간절하옵고, 특히 편지에 담긴 말씀이 참으로 정중하시니 감사합니다.
찬바람이 나는 계절에 정중 기체후 평안하시다니 마음속으로 말할 수 없이 위로가 됩니다. 척하는 병대에서 적고를 해서 국은이 망극하시어 정헌대부로 승진하여주시니 감송함이 그지없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호남은 우리나라의 보장이니 만약에 호남이 없다면 이는 국가가 없어진 것임으로 어제 한산도로 진을 옮겨서 바닷길을 차단하려고 계획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난리 가운데서도 구정을 잊지 않으시고 멀리 위문을 해주시고 겸하여 각종의 물품을 받고 보니 모두가 진중에 귀물이어서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어느 날에나 이 비린내 나는 먼지를 털어버리고 옛날 종유하던 회포를 풀어볼지 알 수가 없고 답답할 뿐입니다. 자리가 시끄러워 감사의 말씀 이만 줄입니다.
癸巳(1593)년 칠월 십육일 척하 이순신 배수
※보내주신 물품은 마포·면포 각 삼 필, 장지·백지 각 삼 권, 황촉 한 쌍, 대복 이 점, 건수어 민어 10마리, 유자 100개는 보내기는 했으나 오지 않았으니 혹시나 짐이 무거워서 그리된 것인지 거리가 멀어서 알 수 없으므로 자세히 써 올립니다.
6. 감역공 현건에게 보낸 서신(1597년)
(1594년 억울하게 잡혀가 선조에게 문초를 당하고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은 1597년 4월 19일 모친상을 당했으나 슬픔을 추스릴 겨를도 없이 원균의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인하여 7월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었다. 장군은 9월 16일 명량 해전에서 13척의 배로 왜선 1백33척을 무찔렀다.)
아침에 주신 편지는 감사하구요. 잠깐이라도 객지 생활에 안녕하십니까? 하물며 집에서 들었지만 존형께서 우리 관아에 머물면서 이 편지를 주셨다니 곧바로 직접 오셔서 답을 해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만 줄입니다.
즉 순신 제배
7. 감역공 현건에게 보낸 마지막 서신(1598년 2월 19일)
(같은 해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어제 겨우 귀주(귀군과 같음)에 왔습니다만 그리 심히 멀지 않아서 혹시 자식이라도 가서 뵙고 문안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렇게 서신을 먼저 주시니 날짜는 좀 오래되었습니다만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새롭습니다. 요사이 봄철에 정양(靜養) 체후가 진중하시다니 반갑고 기쁩니다.
척제(戚弟)는 오랫동안 군인 생활을 하면서 머리와 수염이 모두 희어져 다음날 서로 만나면 몰라볼 정도입니다. 어제 고금도로 진을 옮겼는데 순천에 있는 왜적과 백 리 사이나 되게 진을 옮겼으니 그에 대한 근심 걱정이 되는 것은 어떻게 말로 다 하겠습니까?
지난 신묘년(辛卯 1591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에 진도로 부임할 때에 귀댁이 있는 마을 앞을 지나면서 서호강과 월출산의 명승을 상상하고 지금도 이 병란 중에서도 늘 생각이 나곤 합니다.
세의(世誼) 집정을 잊지 아니하시고 일부러 사람을 시켜 서신을 보내시고 겸하여 각종 물품을 보내셨는데 모두 다 진중에서 보기 드문 물품입니다. 정이 물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존형의 평상시 학력에 대한 공을 여기에서 볼 수가 있어 깊이 감명됩니다. 좌석이 조용치 못해 이만 줄입니다.
무술(戊戌 1598년 ) 二月十九日 척제(戚弟) 순신 배. 현 감역공 댁 회납
(註)
이순신(1545~1598) 정읍현감, 전라좌수사, 삼도수군통제사
현덕승(1555~1627) 병예조정랑, 사헌부 지평, 정읍원님 등 역임
현건(1572~1656) 호 재간제 (在澗齊), 감역공(從九品), 군자감주부(從六品)
<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