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순 희           덕진면 청림길 시아문학회원
안 순 희           덕진면 청림길 시아문학회원

퍼붓던 폭우가 잠시 주춤한 틈에도 창가에서 힘겹게 가을 소식을 알리던 귀뚜라미가 더 맑아진 소리로 문을 흔든다. 밀려드는 열기 때문에 여름내 닫아 두었던 창문을 여니 서늘한 기운에 실려 가을이 쏟아져 들어온다. 아직 숨죽이며 견뎌낼 한낮의 뙤약볕이 남아 있지만 가장 멋진 한바탕 축제를 준비하느라 숲의 악사들이 들썩인다.

연초에 그렸던 큰 그림들은 8월이 중순을 넘기면 별 의미가 없어진다. 온갖 악조건을 뚫고 계획을 실행한 사람의 노력에 따라 결과는 다르다. 봄부터 정성을 쏟았던 고추농사는 길었던 장마에 곰팡이병이 번져 접었고 참깨는 시기를 놓쳐 심지도 못했다. 버거워서 밭농사를 많이 줄인 것이 그나마 잘한 결정이었다고 위안을 삼는다. 주 작목인 벼농사는 불량 상토 파동으로 모부터 문제가 생겨 고생했지만 농협 육묘장의 도움으로 모내기를 끝마칠 수 있었다.

장마가 걷히고 눈부시게 햇빛이 맑은 날 기다리던 손자가 태어났다. 사십여 년 만의 아기 소리였다. 자식을 네 명이나 낳아 길렀는데 이렇게 작은 아기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워낙 건강하게 태어나서 나날이 새롭게 변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다행히 울거나 보채지 않고 자고 깨면서도 배시시 웃으며 일어나니 울음소리가 궁금했다. 자면서 웃기도 하고 찡그리기도 하는 고 조그만 녀석이 어딜 가나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온 집안의 에너지를 다 끌어들이니 행복한 순간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처서에 큰물이 휩쓸고 가면 날랜 새 까먹을 것도 없다는 옛말이 있어 해마다 이맘때면 긴장이 된다. 다행히 올해는 꼭 필요한 때 단비가 내려 폭염에 시달리는 들녘에 생기를 주고 하룻밤 새 계절을 바꿔 놓았다. 비에 무너진 둑은 없는지 둘러 보러 들녘으로 가니 벌써 벼이삭이 피고 서늘한 햇살에 벼꽃이 만발하여 온 들에 쌀 향기가 가득했다. 벼꽃에서 쌀 냄새가 나는 줄은 처음 알았다. 평생 쌀농사를 했으면서도 그 절묘한 때에 들로 나온 덕분에 만난 행운이다. 장마는 길었지만 농협에서 때맞추어 드론을 띄워 공동 방제를 해준 덕에 병충해도 별로 없이 들은 건강하게 푸르다. 

부지런한 농부는 고추 참깨 수박 등 여름작물을 거두고, 처서 전에 가을무 파종을 마쳐서 벌써 싹이 올라오고 있다. 콩이며 녹두도 꼬투리를 지어 알을 채우느라 바쁘고 유난스럽던 장마와 폭염을 이겨낸 곡식들이 오색의 보석을 품어 기르느라 수런거린다. 여름 한 철이 지나고 나면 늘어난 주름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만 경이로운 들녘의 마술에 취해 농부는 또 후년을 꿈꾼다. 9월에 오는 태풍이나 막바지 무더위가 변수가 되지 않는다면 올해 벼농사는 풍년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들녘에 황금 물결이 일렁일 즈음 달 없는 밤이면 펼쳐지는 반딧불의 향연과 가을걷이 끝난 빈들에 내려앉은 서릿바람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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