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순 희        
 덕진면 청림길
 시아문학회원

이른 봄 마른 나뭇가지마다 부풀어 오르는 새 움들의 연둣빛은 연약함이 주는 묘한 매력으로 마음을 설레게 한다. 사이마다 숨었던 산벚꽃이 필 때쯤 산허리로 난 도로를 달리다 보면 하얀색과 어우러져 선명해지는 그 빛은 무릉도원이 연상될 만큼 신비스럽다. 자연이 뿌려 놓은 씨앗들이 자라나서 꾸미는 숲을 바라보자면 옛 시인의 한시 구절이 생각나 한참을 가만히 서 있곤 한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지만 마음의 느낌들은 옛사람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가 보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놓고 
달 한 칸 나 한 칸 청풍 한 칸 차지하니 
강산은 들일 데 없어 둘러 두고 보리라

자연은 어김없이 피고 지며 순환하고 있다. 그 곱던 새싹이 익어 지금 산천은 온통 오색으로 물들어 간다. 서서히 잎 떨굴 준비를 하는 중이다. 일 년을 아낌없이 지워 버리는 통 큰 몸짓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빈 가지에 눈이 덮이고 얼음이 얼면, 초록으로 여름을 덮었던 정열을 속으로 끌어모아 또 다른 1년을 준비하느라 골몰하리라. 자연의 에너지가 연둣빛으로 피어나는 봄, 그 여린 싹에 감도는 빛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두런거린다.

봄나물 뜯으러 언덕을 넘으며 향기로운 꿈을 꾸던 유년의 추억도, 봄 산은 가난한 친정보다 낫다던 어머니들의 산 나들이도 그 연초록이 주는 기운에서 시작되었다. 나물 캐다 물오른 소나무 가지 꺾어서 양지쪽에 앉아 껍질을 벗기면 하얀 속살이 솔향기 나는 단물을 흘렸다. 여기저기 양지마다 솟아나는 찔레 순, 작고 통통한 새순이 품은 삐비 속살 한 웅큼씩 뽑아 들고 넘나들던 산에 세상 다 덮을 것 같이 뻗어 나가는 칡순도 좋은 요깃거리였다. 가을이면 온 산이 과일 창고가 되던 달고 새콤한 정금 역시 잊을 수 없는 맛이다.

철마다 풍성한 먹을거리를 품어 기르는 숲에 잎이 지면 숲은 쉬는 듯 쉴 틈이 없다. 온갖 풀벌레가 살던 자리에 이름 모를 텃새들이 깃든다. 나무껍질 속에 숨겨 둔 벌레 알과 남은 열매들을 먹으며 긴 겨울을 지저귄다. 이른 봄 여린 싹을 갉아먹는 해충을 없애 주는 일을 하는 셈이다. 이렇듯 서로 살리는 자연의 품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무한한 나눔을 받기만 하는 염치없는 사랑바라기이지만 그 연둣빛 봄을 또 기다린다.
드넓은 밭을 갈아 반듯하게 이랑을 지어놓았을 때도 그 설렘을 느낀다. 깨끗이 정돈된 빈 밭에선 온갖 빛깔의 꿈들이 수런거린다. 노랑, 빨강, 보라 등 무지개보다 고운 열매들이 때를 기다리는 모양이 보인다. 시작은 다 연두색으로 움이 돋는다. 세상에 그 새움보다 신비로운 것이 또 있을까? 작고 마른 씨앗에서 싹이 돋아 흙을 뚫고 솟아오르는 힘은 자연의 도움 아니면 될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 마당에 작은 공사를 하느라 백합 뿌리가 1미터도 넘게 깊이 묻혀 버린 일이 있었다. 아까웠지만 잊어버렸는데 다음 해 어느 봄날 자갈 무더기를 뚫고 연두색 여린 싹이 무리 지어 올라왔다. 그때의 감동은 기쁨을 넘어 보이지 않는 힘이 주는 신비로움에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바라보아야 했다. 내가 연두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아니 이유 없어도 연두색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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