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역사 바로 세우기부터 -

▲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된 낭산은 2년뒤에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사진은 낭산의 선거유세 장면.
▲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된 낭산은 2년뒤에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사진은 낭산의 선거유세 장면.

낭산 김준연! 
그는 평생을 항일, 반공, 반독재 투쟁으로 일관하였다. 별세할 때는 본인 소유의 집 한 채 없었으며 소유품이라고는 책과 회중시계 1개, 주머니에 동전 몇 개가 전부일 정도로 청렴하고 강직하며 정의롭게 살았다. 

낭산 김준연 일대기 관련 문헌(文獻) 
낭산 관련 문헌으로는 낭산 자신이 쓴 자서전과 타인이 쓴 단행본 책 및 논문 몇 편이 있다. 자신이 쓴 단행본 책으로는 독립노선(1948), 나의 소전 (1958), 나의 길(1966), 나의 편력(1968)이 있으며, 타인이 쓴 단행본 책으로는 허도산의 건국의 원훈 낭산 김준연(1998)과 이의 보정판(2019)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김상현의 낭산 김준연의 민족운동과 해방 후 정치활동(2008), 이경남의 독불장군 김준연의 정치곡예(1984)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허도산이 1998년에 저술한 <건국의 원훈 낭산 김준연>이 주요한 부분에서 사실에 부합하지 않고 주요 부분에서 누락사항이 많다는 지적이 있어 2019년에 이의 보정판(補正版)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이의 시정이나 누락사항이 보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건국의 원훈 낭산 김준연>으로 본 오류사례 

▲독일유학 갈 때 관비로 갔다는 부분 
여기에서 ‘관비’라 함은 조선총독부로부터의 받은 유학경비인데 김준연은 동경제대 재학 때부터 갑호(甲號)에 해당하는 요시찰대상 인물인데 일제가 김준연을 관비로 독일유학을 보냈다는 것은 어불성설로, 그렇다면 김준연은 이미 친일파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이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발간한 “지운 김철수 친필 유고” 289쪽에서 김철수가 밝힌 것처럼 김준연은 그가 유학 갈 때 국내 여러 사람으로부터 유학경비를 협조받은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중반까지도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우민화 교육정책으로 전문교육을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준연의 독일 유학시 관비 지급 운운하는 것은 시대 상황을 모르는 인사들의 섣부른 주장이다.
▲김준연이 독일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런던대학에서 정치학을 수강하였다는 부분 
낭산은 그의 자서전에서 독일에서 3년간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24년 말에 런던과 일본을 경유하여 1925년 2월 초에 귀국하였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런던대학에서 정치학을 수강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낭산은 당시 귀국할 여비가 없어 독일에 유학한 학생들로부터 여비협조를 받았다.
▲일본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는 부분
일본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려면 일본 고등문관 사법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그런데 낭산은 변호사 자격시험 준비를 한 적이 없고, 변호사 시험에 응시한 적이 없다.
▲조선 최초의 해외특파원이었다는 부분 
조선일보는 1923년 유광열 기자를 상해에 특파했고, 1924년에는 중국 내전 취재에 김동성과 이상철 기자를 특파하였다. 굳이 언급하면 낭산 김준연은 조선일보 최초의 모스크바 특파원이었다.
▲1936년 동아일보 손기정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영어(囹圄)의 몸이 된 후라 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사장 송진우와 함께 일제의 강압으로 동아일보를 사직했을 뿐 영어의 몸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보완해야 할 사항으로는, 김준연은 독일유학 중에도 1923년 10월 항일운동을 했다. 이해 9월 일본 관동대지진 발생 시 일본은 우리 조선인 6천여 명을 학살했다. 이에 김준연은 이극로·고일청 등이 독일에 있는 한인 대표로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일 등 각국 대사관에 ‘일본의 조선에서의 폭압 통치’를 고발했다. 그런가 하면 유럽 각국을 탐방하면서 체험한 사실을 언론에 연재하였던 사실을 민족계몽운동 차원에서 다루었어야 했다.
이외에도 해방정국에서 한민당 주요 간부로서 농지정책 등 정책개발과 미군정하에서 의 활동 사항 및 우리 정부수립에서의 입법사항, 1·4후퇴 당시 다른 도(道)에서처럼 전라남도 24만 장정이 부산으로 훈련받으러 가던 도중 법무부 장관으로서 대통령께 건의, 귀가조치하였던 사건도 보완하여야 했다. 서술하는 데도 특히 한 인간의 일대기는 편년체로 체계적으로 서술하였으면 독자들이 이해하는데 더욱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오류의 파장과 후속 조치 필요 
오류를 정정하지 않고, 보완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오류가 사실로 고착화되고, 이를 근거로 하여 ‘낭산 김준연 기념관’의 전시내용이 빈약하고 중요 부분인 낭산의 항일투쟁 부분이 생략되어 참관인에게 낭산의 항일투쟁의 진면목(眞面目)과 시대정신을 알리는 데 너무 부족하다. 뿐만아니라 학계에서도 낭산의 민족운동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경향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낭산 김준연의 일제하에서의 민족운동과 해방 후 그의 정치활동 및 반공 투쟁 등을 심도 있게 연구한 일대기가 출간되어야 한다. 
    

맺 음 말
필자는 앞서 ‘영암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자’는 제언을 하면서 영암의 근현대사에 나타나고 있는 잘못된 사례를 예시하였다. 그 이유는 잘못된 사례는 바로잡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바로잡지 않으면 그 잘못된 역사가 사실 인양 그 출처도 없이 인용되면서 후세에게 사실이 아닌 거짖을 넘겨주게는 우를 범하게 된다. 뿐만아나라 잘못된 것을 아는 인사들은 그 부분 때문에 전체를 무시하거나 과소평가 한다. 필자가 영암의 의병활동에 관한 탐구를 하면서 박평남 의병부대의 실존 여부를 두고 오랫동안 혼란스러웠다.

낭산 선생 부분도 ‘건국의 원훈 낭산 김준연’의 일대기의 허(虛)와 실(實)을 확인하는데 많은 세월이 소요되었다. 군민과 함께 잘못된 부분은 정정 내지는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끝>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회장)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