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공부하는 까닭은?

필자가 본지에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라는 타이틀로 연재를 시작한 것은 2017년 7월 7일이었다. 첫 번째 주제는 ‘찬란한 마한의 영광을 찾아’였다. 그로부터 만 6년 6개월(78개월)을 매주 거의 빠짐없이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남의 마한 실체와 특성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노력하였다. 필자는 오늘도 장흥고등학교에서 ‘4차 산업혁명과 역사학’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였다. 역사를 공부하는 까닭은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상상력과 분석력, 사고력이 길러져 우리에게 부족한 식견(통찰력)과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하는 능력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최근 한 지상파 방송에서 ‘고려거란 전쟁’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알고 있지만, 고려 건국 초에 고려와 거란은 치열한 세력 쟁탈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송과 연결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던 거란의 고려 견제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 배경이다. 서희 외교로 잘 아는 1차 전쟁이 일어났을 때 고려 조정에서는 국토의 일부를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이 나왔다. 남해신사와 관련이 있는 고려 현종의 나주 몽진은 2차 전쟁이다. 드라마는 2차 전쟁부터 시작되고 있다. 전쟁이 시작되자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하여 전쟁을 피하자는 주장과 싸워야 한다는 강경론이 충돌하고 있었다. 드라마 작가는 시청자에게 묻고 있다. 피해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 잘한 판단인지, 항복하여 싸움을 피한 것이 옳은 것인지를 묻고 있다. 멀리 내다볼 필요도 없다.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러시아와 맞서 싸우는 것이 현명한 판단인지 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역사는 독일과 러시아 양국 사이에 있어 오랜 기간 침략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이번에는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전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작동하고 있었다고 본다. 우리 같았으면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

필자가 2017년 7월 7일 독자들에게 처음 알린 내용 일부를 다시 인용한다. 7년 전과 현재 상황을 비교하기 위해서다. 과연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독자 스스로 느껴보시길 바란다. 

“최근 가야사 연구 및 복원을 국정 기조로 삼겠다는 대통령의 언급에 발맞추어 마한사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영산강 유역 8개 시군이 연합체를 구성한다느니, 전남도에서 전문가 좌담회를 통해 국정 과제에 선정 추진해야 한다느니 하며 부산한 움직임이 있다. 제발 이러한 움직임이 면피용으로 하는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말고 가야사에 비해 연구나 복원사업 등 여러 면에서 비교하기조차 미흡한 이 지역의 마한사 연구의 촉진제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마한은 대한민국 국호의 상징

필자는 무등일보(150회)와 영암신문(276회)의 연재를 통해 마한 연구를 대중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나주의 마한역사문화포럼에서는 해마다 필자에게 마한에 대한 특강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영암군은 1992년 설립된 마한역사문화연구회를 본격적으로 지원하여 마한사 연구 및 체험 프로그램 운영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필자는 영암 마한의 성격을 ‘마한의 심장’이라고 규정하였다. 지난 4월 20일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의 영암 유치를 계기로 우승희 군수가 본격적으로 이 명칭을 슬로건으로 사용하고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 마한은 대한민국 국호의 상징이다. 우승희 군수는 월출산의 국립공원 승격보다 큰 경사라고 하였다. 정말 가슴에 와 닿는다. 발표를 앞두고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던 송태갑 팀장에게 필자는 “내 운으로 된다”고 안심을 시킨 적도 있다. 다른 곳에서 영암군청 공무원들이 하나가 되어 열심히 뛰었다고 하였다, 정말 그들은 열심히 노력하였다. 인생을 살면서 교훈이 있다, 공짜는 절대 없다는 것을.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는 영암에 그냥 오지 않았다. 2000년 마한의 한이 쌓인 영암인의 비원(悲願)이 이루어진 것이다.

마한에서 변한·진한이 나왔고, 백제가 들어섰다. 곧 한반도 중남부의 역사이다. 북쪽에 고조선이 있었다면 중남부는 마한 역사이다. 그 마한의 중심이 영암이라는 사실을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 유치로 확인되었으니 그 무엇하고 바꿀 것인가!

마한 서술은 현행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있다. 필자는 이 서술 비중을 늘리기 위해 지난 7월 7일 영암군의 지원으로 집필자를 초청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엄청난 폭우 속에서도 행사장을 가득 메운 청중의 열기는 집필자들을 감동시켰다. 최근에 확인한 일이지만 60년 넘게 꿈쩍하지 않았던 마한 서술에 긍정적 변화가 보이고 있다. 2024년에도 이러한 세미나를 영암군이 주도하였으면 한다. 마한은 우리 영암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요즘 슬픈 농담을 하고 다닌다. “송OO, 임OO 같은 연예인 한 번 초청하지 않으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지난주 필자에게 격려 전화를 한 전석홍 전 장관께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였다. 

전라남도에서는 마한 인정도서를 개발하고 있다. 필자가 이 일의 책임을 맡았는데, 필자의 집념과 더불어 전라남도의 강한 지원 의지가 필요하다. 전남도교육청 간부 및 장학사, 교사, 그리고 타지역 역사 교사에게 인정도서가 완성되면 반드시 채택하여 줄 것을 당부한다. 이번에 마한 기록을 모으다 보니 뜻밖에도 국내외에 엄청 많은 자료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무광(강)왕이 마한 건국 시조라는 기록부터, 심지어 견훤전에 ‘마한건국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니까 단군 전승과 함께 무강왕 전승이 마한의 시조 전승으로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과 마한을 어떻게 연결지을 것인가는 학계의 과제이기도 하지만 필자가 담당해야 할 일이다. 필자는 마한은 800년 훌쩍 넘는 독자적 역사를 형성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 유물은 물론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학계의 기존 인식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역사 인식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필자의 몫이다.

연재를 마치며

필자는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 영암 유치, 교과서 서술의 확대 및 인정도서 개발, 그리고 마한 기록총서 제작 등 마한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토대 구축에 노력을 하였고, 적지 않은 성과도 일구었다. 여기에는 전동평·우승희 전·현직 군수, 천재철 기획관리실장을 비롯한 군청 공무원, 김한남 문화원장을 비롯한 영암군민, 노순금 시종면 부녀회장을 비롯한 시종의 많은 어르신, 해설사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들의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특히 필자의 대학 동기이기도 한 우종숙 선생은 ‘馬韓’ 글자를 보내 주어 여러 자료집 발간에 활용하고 있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필자의 마지막 바램은 영암 마한유산의 세계유산 등재이다. 지난 11월 8일 그 가능성을 100% 확인한 학술포럼이 영암에서 있었다. 이렇게 가능한 일을 하지 않고 있으면 역사에 큰 죄를 짓는다. 우선 잠정목록 작성 작업을 시작하여야 한다. 1년이면 충분하다. 영암군이 주도해야 한다. 마한은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가득 담고 있다. 머뭇거리면 다른 지역에서 선점한다. 

영암군은 마한역사문화연구회의 설립 및 지원, 마한문화공원 조성, 마한축제 개최 등을 통해 ‘고대 동아시아 해양 문명의 허브, 영암’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특히 ‘마한의 심장, 영암’ 슬로건은 영암인의 자존감을 더욱 당당하게 할 것이다. 마한 유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된다면 지역경제 발전에 엄청난 부가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필자에게 7년 가까이 한 지면을 통 크게 할애한 영암신문 문배근 대표의 용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먼 훗날, 영암의 역사는 이를 높이 평가하리라 믿는다.

필자는 오늘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동안 동일 내용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새로운 독자들에 대한 배려 차원이기도 하였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곧 새로운 주제로 독자 여러분을 뵙기를 기대한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영암신문 독자, 그리고 영암군민께서 보내 준 고마운 마음, 영원히 기억하고, 영암발전의 밀알로 보답할 것을 약속한다. 새해에도 건승을 빈다.
글=박해현(초당대 교수·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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