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50] 김헌창의 난을 통해 본 마한의 정체성 재론(상)

 ‘마한의 심장, 영암’의 실체가 새롭게 부각되면서 지역주민들의 마한축제 행사 참여 열기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2022년 11월 열린 마한축제 행사 때 ‘마한 그림 그리기’ 대회에 참가한 시종면 부녀회원들이 손주뻘인 초·중학생들과 함께 마한문화공원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마한의 심장, 영암’의 실체가 새롭게 부각되면서 지역주민들의 마한축제 행사 참여 열기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2022년 11월 열린 마한축제 행사 때 ‘마한 그림 그리기’ 대회에 참가한 시종면 부녀회원들이 손주뻘인 초·중학생들과 함께 마한문화공원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필자가 본란을 통해 ‘마한역사’를 연재한 지 만 6년, 250회에 이르렀다. 본란을 통해 대한민국 정체성의 상징인 마한의 중심지이자 마한 문명의 발상지가 ‘영산 지중해’라고 주장하였다.  ‘마한의 심장, 영암’의 실체가 새롭게 부각이 되었고, ‘해상강국 마한’이라는 전라남도의 지향성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2017년 시작되었던 필자의 연재 글은 2017년 5월 임기를 시작한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프로젝트와 맞물려 마한사에 관심을 증폭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본보에 계속 연재되는 글을 통해 독자들은 마한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영암 마한’의 정체성을 지역민뿐만 아니라 출향민, 그리고 다른 지역민들도 인식하였다. 과거 동아시아 허브 기능을 하며 마한 문명을 창조하였다는 군민들의 자부심은 갈수록 높아지는 주민의 마한 행사 참여 열기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2022년 11월에 열린 마한 행사를 주관한 필자는 ‘마한 그림 그리기’ 대회에 참가한 시종 부녀회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평균 연령 70대 중반에 해당하는 ‘젊은’ 부녀회원들이 손주뻘인 초·중학생들과 함께 마한문화공원에서 크레파스로 ‘마한’을 화폭에 담는 장면은 한 폭의 수채화였다. 시종과 이웃한 반남면 주민들도 마한왕국 후예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들 역시 마한역사문화연구회가 주관한 답사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두 지역이 과거에 하나의 마한 연맹체를 형성한 사실에 환호한다. 한민족 정체성의 상징인 마한이 여느 특정 지역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독자적인 마한 문명

최근 후백제의 왕도를 형성한 전북에서는 후백제를 새롭게 보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대표적인 것이 전북일보와 후백제학회가 공동으로 기획한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라는 시리즈인데 30여 회 가까운 연재를 기획하여 연재를 시작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마한의 정체성이 후백제 건국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 필자도 시리즈의 방향성에 공감하여 참여하고 있다. 

사실, 견훤은 고려를 세운 왕건과 최종 삼국 쟁패전에서 패하였기 때문에 고려 시대에 편찬된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에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였다. 경상도 상주 출신 견훤이 이 지역에 형성된 마한, 백제의 정체성을 이용하여 나라를 세웠으나 삼국 통일에는 실패하였다. 이는 그가 마한, 백제를 계승한다고 표방하였지만, 마한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데 한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견훤에 앞서 무주와 완산주에서 도독을 역임하였던 김헌창은 새로운 왕조를 표방하며 마한, 백제의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이는 통일신라 말까지도 백제는 마한의 정체성이 이 지역에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항상 ‘전라도 정신’의 실체에 관심을 가졌던 필자는 ‘마한’에서 그 연원을 찾았다. 고유의 토착성에 다양한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성이 결합하여 ‘영산강식 토기’로 대변되는 창조적이고 융합적인 ‘마한’ 문화가 구체적인 이 지역의 정체성의 토대가 되었다. 이 지역의 정치체들이 마한 연맹체를 800년 가까이 유지됨으로써 독자적인 마한 문명이 형성되어 뿌리내려졌다. 

강력한 저항의식의 표출 

왕인박사의 후예인 ‘행기(行基)’스님이 왕인이 도래한 지 수 세기가 흘렀음에도 ‘백제계’ 아니 ‘마한계’라는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나 전북 김제 금산사에서 법상종을 개창한 유명한 진표율사가 백제가 멸망한 지 200년이 지났음에도 ‘백제인’이라는 사실에서 이 지역에 흐르는 정체성의 실체를 쉽게 확인할 수 있겠다. 무강왕 설화가 전해지는 익산과 그리 멀지 않은 김제 지역도 오랫동안 마한의 영역이었다. 진표스님이 말한 ‘백제인’이라고 하는 것은 ‘마한인’이라는 말로 치환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렇듯 마한인들이 지녔던 정체성은 정치적으로 이 지역이 억압을 받았을 때 강한 저항의식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백제가 마한지역과 대등한 수준의 통합을 이룬 후에 ‘남부여’라고 국호를 바꾸어 부여계의 정통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마한인들이 반발하자 백제는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왕의 익산 천도론까지 나왔다. 의자왕이 왕권을 강화하며 마한 세력으로 상징되는 귀족세력을 제어하려 하면서 나타난 정치적 혼란은 결국 백제의 붕괴로 나타났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적극적인 융합정책 대신, 경주 중심의 정치를 지향하는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앞서 언급한 진표가 ‘백제인’이라고 하여 멸망한 지 200년이 지난 왕조 출신임을 강조하는 것이라든가, 고려 초에 세워진 월출산 남쪽의 강진 월남사 3층석탑이 신라계와 무관한 토착적 전통양식이 배어있는 석탑이 조영되는 것에서 고유한 역사적 전통은 더욱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옛 마한·백제계가 지닌 정치적 상실감은 통일 후에도 더욱 강화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고착되면서 이 지역의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이 나타났다. 영암출신 장보고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강력한 해상세력을 건설한 원동력이나 마한·백제의 부흥을 외치며 새로운 왕조를 건국한 견훤의 사례가 이를 말한다. 

그러나 장보고 등장 이전에 무주(전남), 완산주(전북) 등 옛 마한지역에서 신라 정부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치체를 건설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822년 신라 왕조를 뿌리째 흔드는 대규모 반란이 있었다. 김헌창이 난을 주도하여 ‘김헌창의 난’이라고 역사가들은 지칭한다. 이 난에 대해 과거에는 김주원계와 김경신계 사이의 왕위 쟁탈전 연장으로 보거나, 무열왕계의 왕위부흥 운동으로 보기도 하였다. 또한, 인사정책에 대한 불만에서 반란의 원인을 찾거나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지닌 중앙귀족과 지방세력의 합작으로 보아왔다.

신라와 다른 정치체제

그러다 최근 김헌창이 국호와 연호를 새롭게 사용하는 등 신라와는 다른 정치체제를 지향하였고, 이 사건이후 지방세력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며 중앙집권을 지향하는 신라의 정치는 붕괴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와 달리 옛 마한지역에 속하였던 무주·전주 지역이 이러한 반란에 가담한 것은 마한 이래로 이 지역에 강고하게 형성된 정체성이 표출된 것이라고 난의 배경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최근 완성된 ‘전라도 천년사’에 담아 놓았다. 이미 본란을 통해 언급한 바 있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요약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김헌창의 부친 김주원은 신라 38대 국왕이 된 김경신(원성왕)과의 왕위 계승전에서 패배하여 강원도 명주(강릉) 땅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명주군왕’을 자처하였다. 김주원이 왕위계승 싸움에서 승리하였다면 김헌창은 응당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김헌창이 반란을 꾀한 것은 그의 부친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반발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김헌창이 도독으로 있는 웅천주를 비롯하여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 등 9개 주 가운데 무려 다섯 주, 그리고 5소경 가운데 국원, 서원, 금관소경 등 세 소경이 가담하는 등 거의 모든 지방이 반란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정치 세력 간의 다툼으로만 해석할 수 없게 한다. 이들 지역이 김헌창의 난에 가담하였던 까닭을 김헌창의 위협 때문이라고 삼국사기에서는 말하고 있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들 지역이 오히려 김헌창의 거병에 뜻을 같이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계속>
글=박해현(초당대 교수·마한역사문화연구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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