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48] 고대 동아시아 허브 기능을 한 ‘영암 마한’

‘마한의 심장’ 영암은 일찍이 황무지 상태인 마한사에 관심을 갖고 마한 관련 학술연구 및 발굴조사, 마한 체험활동 등을 체계적으로 추진하여 ‘마한특별법’ 제정의 토대를 구축했다.  .
‘마한의 심장’ 영암은 일찍이 황무지 상태인 마한사에 관심을 갖고 마한 관련 학술연구 및 발굴조사, 마한 체험활동 등을 체계적으로 추진하여 ‘마한특별법’ 제정의 토대를 구축했다.  .

최근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를 유치하려고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의 경쟁이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 국호인 ‘한(韓)’의 기원이 되는 마한을 연구하는 총본산을 서로 자기 지역에 두고자 하는 것이니 이러한 움직임을 마한 연구자로서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관심이 평소에 진정성 있게 있었다면, 마한사가 교과서에서 거의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사실 전남도와 영암군이 이른바 ‘마한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그것을 입법화하려 노력할 때, 다른 광역자치단체에서는 ‘OO가야사’를 표방하거나 이러한 사실이 있는지조차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한특별법’이 처음 제정될 때 전라남도와 영암군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는 마한 문명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인 영산강 유역이 특별법의 공간 범위로 설정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입법이 이루어지고, 국비 예산 편성이 가시화되자 ‘공간 범위’가 잘못되었다 하여 광주, 전북, 충남, 심지어 청주까지도 마한의 영역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서울도 당연히 마한의 중심지임을 이야기하고 나섰다. 

누차 이야기하였지만, 마한에서 변한·진한이 갈라져 나왔고, 백제가 마한 땅에 들어와 둥지를 틀었다. 한강 유역 이남의 한국사의 원형은 마한인 셈이다. 그러니까 현재 대한민국 지자체들이 마한의 적통을 계승했다고 서로 주장함은 당연하다. 바야흐로 한국사의 원형인 마한사를 제대로 정리할 기회가 왔다는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고무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 

‘마한특별법’ 제정, 토대를 구축하다  

전라남도와 영암군이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마한이 포함되도록 하는 데 가장 앞장섰다. 영암군은 이미 전국 최초로 1992년 민간단체인 마한역사문화연구회의 설립을 지원하여 황무지 상태인 마한사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2004년에는 전국 유일의 마한문화공원을 조성하였으며, 2015년에는 전국 최초의 마한축제를 개최하는 등 마한 역사의 정체성을 밝혀 지역 발전의 토대로 삼고자 하였다. 영암군은 열악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이벤트성 행사를 지양하고, 마한 관련 학술연구 및 발굴조사, 마한 체험활동 등을 체계적으로 추진하여 마한특별법 제정의 토대를 구축하고, 마한 유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통해 마한유산의 가치 제고와 더불어 이를 지역 발전의 동력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매년 답사프로그램과 학술 세미나를 위해 ‘지속적으로’ 예산 지원을 한 지자체는 영암군이 유일하다.

전남 여러 곳의 마한 실체를 밝히며 마한의 정체성을 후백제 시기까지 추적하였던 필자는 영암군·의회, 마한사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영암군민의 뜨거운 응원을 잊지 않고 있다. 물론 이웃 나주시에서도 순수 시민단체인 ‘마한역사포럼’이 결성되어 영산강 유역 마한문명의 실체를 찾는 데 앞장서고 있다. 필자는 과거 두 지역이 하나의 연맹체를 구성하여 마한 문명을 건설한 역사를 상기하며 나주와 영암이 하나의 마한 역사문화권을 건설하여 찬란한 마한 문명의 현재적 가치를 재현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영암이 왜 ‘마한의 심장’인가

오늘은 필자가 늘 강조한 것으로, 이미 본란을 통해 언급한 내용을 상기하고자 한다.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가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이는 입지 선정의 타당성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먼저 왜 마한을 역사자원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포함시키는 데 전라남도가 주도하였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마한의 정체성이 전라도의 정체성의 토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마한의 정체성이 무엇이고, 그것이 전라도 정체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물어보면 공허한 답만 나온다. 이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4세기 후반 시기로 추정된 ‘금동신발’이 ‘백제’의 금동신발로 ‘보물’ 지정되어도 지역의 전문학자, 언론, 필부 등 평소 그렇게 ‘우리 지역의 마한’을 얘기하던 이들이 그 출토 신발이 마한 것이라고 당당히 문제를 제기한 사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정촌고분 출토 신발을 ‘백제’의 것으로 보는 셈인데, 그러하다면 5세기 후반, 이 지역은 여전히 백제의 영역이 되는 것이고, 백제문화의 영향권에 있는 것이 됨에도 말이다.  

필자는 마한의 중심지이자 마한문화 발상지가 ‘영산 지중해’ 일대라는 주장을 줄곧 해왔다. 이는 문헌과 출토 유적·유물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영산 지중해의 중심을 나주 반남·영암 시종 일대로 보고 있는데, 이곳에 분포한 수십 기에 달하는 거대 고분군과 출토 유물은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지역이 마한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거대 고분군을 가지고서 흔히 설명한다. 하지만 고분의 규모만 가지고 설명하기에는 너무 식상(食傷)하다. 다른 이는 이곳에서 출토된 독무덤도 이 지역의 마한문화의 특성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옳은 얘기이다. 그렇지만 독무덤이 왜 마한문화의 특성인지에 대한 설명이 따르지 않고 독무덤이 거대하니까 이 지역을 대표하는 마한 유적이라는 설명을 반복하는 것 또한 막연하다.  

필자는 영산 지중해의 마한의 역사성은 대륙문화와 해양문화가 교류·융합하여 새로운 문물이 창조되어 동북아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 데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얘기하였다. 그것은 지리적인 위치에다, 이곳에서 확인된 수많은 유물에서 그러한 성격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가령, 국립나주박물관에 주변국의 독무덤이 영산강 유역 출토 독무덤과 함께 진열되어 있지만, 한국, 베트남, 중국 등과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 고유문화 증거임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그 특성을 밝혀야 한다. 

마한의 국제항 남해포의 남해신사 역시 비록 그 신사 자체는 고려 초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지만, 그 이전 마한 시기부터 이루어졌던 해양을 통해 이루어진 교류·융합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고대 해양신앙의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유적임을 알아야 한다. 남해신사가 차지하는 해양사적 위치를 마한과 연결을 짓고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의 해양신앙과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 마한의 고유한 해양문화로 설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왜와 가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마한 문명을 창조한 결정적 증거를 보여준 장동 방대형 고분의 토괴, 인골이 출토된 옥야리 고분, 금동관편이 출토되어 시종·반남의 정치체 실체를 확인한 쌍무덤, 모든 고분에서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마한의 상징 옥(玉) 유물과 영산강 토기 등 영암 시종의 마한 유적·유물은 이 지역이 영산강 내해에 ‘마한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곳임을 설명하고 있다. 영암 마한이 마한 문명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필자가 영암 마한을 지칭하여 ‘마한의 심장’, 또는 동아시아 문명의 허브였다고 감히 이야기하는 까닭이다.

지정학적 특성의 마한사 정체성  

이처럼 우리 지역에서 확인된 유적·유물의 의미를 새롭게 설명할 때 비로소 영산강을 중심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마한 문명이 새롭게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된다. 여기에 마한특별법 제정의 목적이 있다. 

이태리의 위대한 역사가인 크로체(B.Croce)는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라고 하여 역사의 현재성을 강조하였다. 마한사의 의미를 단순히 마한 시대에 국한시켜 해석한다면 그것의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마한사가 지니는 정체성을 이후 우리 역사의 전개와 연결지어 해석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마한은 우두머리가 백성들과 서로 함께 살았다고 하는 기록이나 대·소 세력 차이가 큰 진한·변한과 달리 마한은 정치체 사이의 세력 차이가 크지 않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상호 공존하였던 마한 연맹체 사회의 특성을 읽을 수 있다. 1862년 함평 농민봉기나 1980년 5·18 등은 우리 지역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공동체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국보로 지정되어 교과서에 그 사진이 수록되어 있지만, 영암에서 독자적 청동기 문화를 설명해주는 거푸집이 출토된 것도 새로운 문물의 교류·융합이 활발히 이루어져 일찍부터 문명의 꽃을 피웠던 이 지역의 지정학적 특성을 보여준다. 일찍이 마한 시대부터 동아시아 문명의 허브 역할을 영산 내해가 담당하여 마한 문명을 창조하였던 전통을 오늘의 전라도 정신으로 이어지고 구체적으로 찾아내어 이 지역의 정체성으로 발전시켜야 함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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