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의 동상 / 중국 산동반도 법화원에 세워진 장보고의 동상. 청해진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패자가 되었던 장보고는 당시 신라인보다 오히려 중국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장보고의 동상 / 중국 산동반도 법화원에 세워진 장보고의 동상. 청해진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패자가 되었던 장보고는 당시 신라인보다 오히려 중국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역사는 반복한다. 이번 이태원 참사도 2014년 발생한 세월호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탓이다. 필자가 이렇듯 강하게 말한 까닭은 녹취록이나 보고 채널 등에서 어쩌면 2014년과 판막이라고 하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역사가 소중한 까닭이다. 

최근 도갑사 산사음악회를 다녀왔다. 도갑사는 도선 스님이 주석하여 유명해졌다. 도선 스님의 얘기는 이미 본란을 통해 상세히 언급한 바 있거니와,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필자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믿는다. 

해상왕 장보고

얼마 전 모 연구기관이 장보고와 마한이 관계가 있는지를 학술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미 본란을 통해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고 하며 기회를 달라고 하였으나 다른 예산으로 전용되고 말아 안타까웠다. 필자의 주장을 공론화 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필자가 장보고 관련 글을 쓴 사실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기억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앞서 살핀 내용을 압축하여 다루어 보고자 한다.

장보고처럼 한 인간이 교과서에 거의 한쪽 분량이 서술돼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우리 교과서가 장보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장보고는 한국사에서 가장 영웅적이고 진취적 인물이라 평가해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1934년 김상기 박사가 고대 해상무역과 관련하여 장보고를 주목한 이래 해상무역의 측면에서 주로 관심이 이루어졌다.그러다가 1990년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가 출범하고 2000년 부설 해상왕장보고연구회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연구와 교사 해외연수 등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일찍이 미국 하버드대학의 일본사 연구의 권위자이자 주일 미국 대사를 지낸 세계적 석학 랴이샤워(Edwin O. Reischauer)교수가 ‘무역왕자(merchant prince)'이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국제적으로 주목되었다. 그가 살았던 9세기 신라는 경주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붕괴되고 지방에서 성장한 호족들이 사회 변동을 주도하던 때였다. 중앙은 권력다툼으로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고, 농민층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그러나 오히려 민중들 스스로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나갔던 역동의 시기였다.

동아시아 해상왕국 건설

장보고는 중국 산동반도의 남해안 일대와 대운하·淮河유역의 여러 도시에 있었던 수많은 신라인 사회와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교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와 중국·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이른바 삼각무역을 지배하여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패자가 되었던 것이다. 청해진을 근거로 하는 해상왕국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골품제라는 엄격한 당시 신분제 아래에서 오로지 본인의 노력으로 이룩한 거대한 성취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게 하였다. 그의 성공 얘기는 신라인들보다 오히려 중국인들에게 보다 관심의 대상이었다. 당의 유명한 시인 두목(803~852)이 지은 ‘장보고·정년전’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두목의 글은 장보고의 생존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장보고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잠시 인용해보기로 한다.

“신라사람 장보고와 정년은, 신라로부터 서주에 와서 군중소장이 되었다. 보고는 30세였고, (정)년은 그보다 10세 아래여서 보고를 형이라 불렀다. 모두 싸움을 잘하여 말 타고 창을 휘둘렀는데, 그들의 본국과 서주에서 능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중략)서로 용감함과 건장함을 겨루었는데, 보고가 년에 다소 미치지 못하였다. 보고는 나이가 위라는 이유로, 년은 무예가 앞선다는 이유로, 항상 다투면서 서로 아래에 있지 않으려 하였다.(하략)” ‘신당서’ 동이전과 ‘삼국사기’ 열전(장보고·정년전)을 작성하는데 이용된 두목의 글은 장보고의 인간적인 위대함, 넓은 도량과 불타는 의협심 등을 다루고 있다. 역시 일본의 유명한 승려 엔닌(圓仁793-864)이 장보고에게 쓴 편지가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수록되어 있다.“태어난 이후로 뵈옵지는 못했으나, 높으신 이름을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기에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이 더해갑니다. (중략) 이 엔닌은 어진 덕을 입었기에 삼가 우러러 존경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품어온 뜻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에 머물고 있습니다. 부족한 이 사람은 다행히 대사(장보고)께서 발원하신 곳(적산원)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감사와 기쁨 이외에는 달리 표현하여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중국에 유학 갔을 때 장보고가 세운 적산원에 기거를 한 엔닌이 그 고마움을 담은 내용으로,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장보고의 너그러운 인품이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장보고의 출신에 관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 열전에 “장보고는 궁복(弓福), 정년의 年은 連이라 하는 데 모두 신라인이다. 다만 고향의 父祖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다”라 하였다. 궁복이라 이름하였던 것은 활을 잘 쏘아 불려진 ‘활보’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그의 고향은 알 수 없다. 다만 훗날 그의 딸이 왕비가 되려 할 때 경주 귀족들이 ‘海島人’이라 하여 반대한 사실에서 ‘섬’ 출신이 아닐까라는 추정만 할 따름이다. 그가 어느 섬 출신인지도 알 수 없다. 여러 섬 가운데 굳이 완도에 ‘진’을 설치한 것으로 볼 때, 완도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가 있다. 이 주장을 바탕으로 장보고를 완도 출신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납비하려 할 때 중앙 귀족들이 ‘섬사람의 딸’이기 때문에 반대하였다는 것에서 장보고가 섬 출신이라고 단정해도 좋을지 의문이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섬사람’이라고 중앙 귀족들이 무시하여 불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보고가 반드시 ‘섬사람’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완도 지역에서 장보고의 출생과 관련한 설화 등이 전하고 있지 않은 것도 필자의 이러한 의심의 또 다른 근거라 할 수 있다. 다음의 설화를 살펴보도록 하자.

영암 출생 설화“우리 선암마을은 신라 때 해상 무역왕이었던 장보고가 태어난 마을이어라. 장보고 장군이 태어났다고 해서 ‘무장골’이라고도 하고, 장보고가 어렸을 때 뛰어 놀았던 둑이 있었는디 ‘장군둑’이라고 했어라. 우리 마을은 월출산을 마주보고 있고, 조선시대에는 마을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어. 마을 앞에 있는 바위에 배를 묶었다고 하여 그 바위를 ‘배선’자를 써서 ‘선암’이라 했어. 그리고 건덕바우, 국두암 이러한 신령스러운 바우들이 있어서 ‘신선 선’자를 따서 마을 이름을 선암마을이라 하지라.”“경지 정리할 때 없어져 부렀는디, 마을 앞에가 ‘국두암’이 있었어.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마을 앞에 부두와 선착장이 있었는디, 어렸을 때도 들은 얘기로 장보고가 당나라로 갈 때 배를 탓던 곳이 바로 국두암이었대. 마을 뒤편에 건덕바우가 있는디, 장보고 모친이 거기에서 칠년간 기도해서 아들 궁복을 얻었다고 해. 옛날에는 장보고를 궁복이라고 하고 궁파라고도 했지. 그곳에서 장보고가 태어났다 해서 아주 명소가 되었다네.” “조선시대에는 매년 군수들이 그곳에서 풍년 기도를 드렸어. 그리고 고종 때에는 영암군수가 마을에 관풍정이라는 정자를 건립하고 시를 지어 현판을 만들었는데 정자가 초가집으로 지어 관리를 못한데다 무너져 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 아쉽다네.”이런 설화는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장보고의 출생과 관련된 것이다. 

당 시인이 작성한 장보고에 관한 최초의 전기가 신당서 및 삼국사기에 전재되어 있다. 사서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장보고와 정년)의 고향과 父祖는 알 수 없다”고 하여 출신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에만 언급되어 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당시 장보고의 출생과 관련된 자료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암 덕진면 선암마을에 장보고의 출생 설화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은 전승 시기가 언제였는가를 떠나 주목되고도 남음이 있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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