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곤 / 금정면 출생 / 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전문연구위원 / 전 한국섬유기술사회 회장 / 전 충남대, 청운대학교 교수
김해곤 / 금정면 출생 / 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전문연구위원 / 전 한국섬유기술사회 회장 / 전 충남대, 청운대학교 교수

“어이, 김회장! 자네 이제야 전라도 사람 같네그려.”
요즘 중고등학교 동창회나 대학 동창회가 나가면 자주 듣는 말이다. 나는 전라남도 영암이 고향이다.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광주에서 나왔고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13년이나 했다. 그런데 새삼 이제야 ‘전라도 사람’ 같다니!

인생이 담긴 내 ‘짬뽕’ 사투리

이유인즉 이렇다. 1999년 청운대학교 교수직을 정년퇴직하고 2003년 갑을방적을 마지막으로 기업인의 생활을 정리하고 나니 내 모임의 중심은 아무래도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동창 모임이 되었다. 요즘도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동창 모임에 나가면 친우들의 사투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투리를 별로 안 쓴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친우들의 말을 듣자니 내 말투는 전라도 것도, 경상도 것도, 충청도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딱히 표준어도 아니었다고. 콕 짚어 말한다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사투리의 ‘짬뽕’ 정도랄까. 

내 말투에는 내가 살아온 인생이 담겨 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나서 중고등은 물론 대학교까지 광주에서 나왔다. 대학 졸업 직후 약 1년 서울에서 공직생활을 하고는 바로 다시 광주로 내려가(공직 퇴직 후 처음 간 직장인 일신방직이 광주에 있었다) 13년 동안 생활했으니 뼛속까지 전라도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일신방직에서 퇴직한 후에는 충청도, 경상도에서 줄곧 생활했다. 가장 오래 몸담았던 직장인 충남방적(주)와 청운대학교의 근거지가 충청도였으며, 마지막 퇴직한 회사인 갑을방적(주)은 경상도가 근거지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든 지역의 말들이 섞여 나만의 언어가 만들어진 셈이다. 따지고 보면 사투리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가장 큰 계기였다. 

전라도 촌놈 서울 가다

벌써 6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막 사회에 발을 내디딘 사회 초년생 때의 일이니까.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던 1960년대 초는 너 나 할 것 없이 어려웠던 시절이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일자리가 어서 옵쇼 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막말에 어디 시골 공무원 자리라도 하나 꿰차고 앉으려면 국회의원이니, 어디 어디 장(長)이니 하는 소위 ‘빽’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나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광주 명문인 광주서중과 광주고, 전남대를 꽤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마땅히 취업할 데가 없었다. 희망이라면 매년 신입 연구원을 뽑는 국립공업연구소(현 국가기술표준원)뿐이었다. 모집 인원은 달랑 두 명.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시험공부를 했다. 하숙방의 벽이며 천장이며 모두 시험 관련된 메모를 빼곡하게 붙여 놓았고, 새벽같이 일어나 도시락 두 개를 들고 등교를 해 통금 직전까지 공부, 공부에 매진했다. 결과는 합격. 하늘에 별 따기 같았던 국립공업연구소의 연구원이 되었다. 공무원이 된 것이다. 

상경을 해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하숙비는 1만 환이었다. 식사 제공이니 딱히 비싸다고 할 수도 없는 금액이었다. 문제는 월급이었다. 첫 달 월급을 받았는데, 월급이 1만 환이었던 것. 하숙비를 내고 나면 교통비조차 남지 않았다. 고향 집에 손을 벌릴 상황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고향에서는 “영암 수재 김해곤이가 어려운 공무원 시험에 떡 붙었다더라”며 경사 분위기가 아니었던가. 

당시 국립공업연구소 연구원이라면 4급을 이었음에도 월급이 고작 1만 환이었으니 국가 재정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무튼, 나로서는 당장 오갈 교통비조차 마련할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 선생님, 사투리 써서 싫어요”

그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서울에 사시던 먼 친척 고모께서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생이라고 불렀다)의 과외를 주선해 주신 것이다. 직장 퇴근 후 해야 하는 일이라 몸은 피곤했지만 한 달에 무려 5천 환이라는 과외비는 당장 한 푼이 아쉬웠던 내게는 하늘의 동아줄 같았다. 무려 월급의 반이 아닌가. 

기꺼운 마음으로 열심히 학생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 동아줄이 두 달 만에 끊어졌다. 학생 아이가 내게 과외를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는 것. 도대체 왜? 소개해 준 사람을 통해 알아본 이유는 “그 선생님, 사투리 써서 촌스럽고 싫다”고 아이가 말했다는 것이다. 

당시 전라도에서 갓 상경한 터였으니 나의 사투리는 꽤 정도가 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충격이었다. 사투리가 싫어서 과외선생을 자르다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당장 교통비조차 마련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하루는 직장 선배가 조용히 나를 불러 신문에 나온 광고를 보여 주었다. 전남방직(주)(1961년 8월 일신방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의 제1회 공개채용 공고였다. 선배는 “자네 정도라면 충분히 합격할 걸세. 한 번 응시해 봐”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선배의 권유에 시험이라도 한번 봐보자는 심정으로 전남방직의 공채 시험에 응시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그 선배의 양해를 얻어 매일같이 태창방적에 다니던 중고교 선배 정문규 씨에게 가서 족집게 과외를 받으며 공부했다. 경쟁률도 어마어마했다, 모집정원이 3명이었는데, 응시생은 무려 130명이었으니! 그러나 이번에도 당당히 합격이었다. 그것도 수석합격! 쪽집게 과외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제시한 조건은 상상 이상이었다. 월급 7만2500환, 사택 제공, 식사제공, 유니폼 제공. 연구소에 비하면 무려 10배 이상의 급여 인상이 되는 셈이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니 망설일 수가 없었다. 당장 생활이 되지 않는데, ‘공무원’이란 타이틀에 얽매일 수 없었다. 연구소에 사표를 던지고 전남방직으로 이직을 했다. 국립공업연구소에 입사한 지 불과 1년도 채 되지 못했던 시점이다.

공무원에서 섬유인으로 인생 전환

만약에 내게 과외를 받던 그 국민학생이 ‘사투리’를 싫어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돌아보건대, 나는 계속 국립공업연구소에 남았을 것이다. 나랏일을 하는 것을 ‘벼슬’하는 것으로 알았던 당시의 정서상, 생활이 어렵지 않았다면 굳이 공무원 신분을 벗어던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사투리를 쓰는 선생이 못내 싫었던’ 그 어린 학생 덕분에 나는 공무원 신분을 벗어던지고 평생 ‘섬유인’의 인생길을 걸은 것이다. 

이만하면 사투리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어린아이만이 아니었다. 요즘에야 사투리가 지방의 특색으로, 문화적 다양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1960년대는 물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투리에 대한 인식은 좋지 못했다. 특히나 전라도 사투리에 대해서는 지역 편견까지 더해져 안 좋은 인식이 극에 달했었다.

특히 나는 사투리 때문에 직장까지 바꿀 수밖에 없었던 충격 때문에 사투리를 쓰지 않고, 표준어로 말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래서 전라도 사투리는 많이 고쳤는데 충청도에서 25년을 사는 동안 내 말투에 충청도 사투리가 스며들었다. 

충청도 사투리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충남방적(주)의 전무이사 시절 산업훈장을 받고 미국 출장에 오른 적이 있다. 그때 잠깐 틈을 내 하와이에 들러 원데이 투어버스를 타고 마오이섬 등을 관광했다. 투어버스에는 한국 사람이라곤 나와 또 다른 한 사람, 단 둘뿐이었다. 자연히 둘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을 함께 먹게 되었는데, “혹시 충청도 분 아니세요?” 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충청도 예산이 고향인 미국 공인회계사인데 말씨가 영 충청도라고 같은 고향 사람 만났다고 어찌나 기뻐하든지! 알고 보니 그는 내가 예산공장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함께 일했던 신모 과장의 삼촌이었다. 그는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고 밝힐 때까지 정말로 충청도 사람인 줄 알았다며, “어떻게 전라도 사람이 전라도 사투리를 하나도 안 쓸 수 있죠? 사투리만 보면 영락없이 충청도 사람이에요”하며 감탄까지 했다. 그렇게 말을 튼 그와 나는 관광을 마치는 저녁까지 고향 친우처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관광을 즐겼다.

길다면 긴 인생 항로, 누구에게나 우여곡절이 없을 수는 없을 터.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와 내 인생을 돌아보면 참 많은 굽이굽이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인생이다. 흐르는 물처럼 굽이굽이 돌면서 막히면 돌아가고, 깊으면 잠겨도 보고, 낭떠러지에서는 거침없이 떨어져 보기도 한 게 나의 인생이다. 다만, 그저 다툼없이 살라는 계명을 따르며 살고 싶었을 뿐이고, 그 인생의 역정에서 ‘사투리’라는 것이 굽이마다 큰 전환의 계기가 되었음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공직으로 시작한 내가 섬유인으로서 온 평생을 살게 된 계기가 바로 사투리 때문이었고, 그 길에서 비록 ‘짬뽕’ 사투리이지만 내 인생을 담은 언어를 얻게 되었으니 어찌 사투리의 역할을 작다 할 수 있을까.

섬유인으로서의 나의 인생은 나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섬유업계에서는 유일하게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대통령상을 받았고, 전국 섬유기술사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아시아에서는 제일 큰 규모의 종합 방직회사를 건설해내기도 하였으며, 2만여 명의 종업원이 근무하는  방적회사 최고 임원 및 이보다 규모가 작은 방적회사 사장도 해 보았다. 특허도 서너 건 취득하였으며  그리고 대학에서 교수로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정년퇴직을 하였다. 정년 후에도 해외공장의 기술지도를 5년 동안 하면서 많은 실적을 쌓기도 해보았다. 이만하면 우리나라 섬유산업 발전에 초석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니 마땅히 내 인생길에 후회와 여한은 없다. 그럼에도 가끔 60여 년 전, 내가 인내와 인내를 거듭하여 공직을 버리지 않고, 계속 그 길을 걸었다면 나는 어떤 인생 항로를 항해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대학 교직과 기업에서 퇴직을 한 지 이십 년이 되어 가고, 고향 친우들을 만나는 기회가 점점 많아지면서 이제 나의 말투에 전라도 색이 점차 돌아오는 듯하다. 그래서 동창 모임에서 만나는 친우들이 ‘이제 옛적의 동무’를 보는 것 같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 친우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사투리에 얽힌 애환이 있겠지만 나처럼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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