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찬형 / 학산면 독천리 출생/연합뉴스TV 보도국장/전 연합뉴스 정치부장·국제뉴스2부장·통일외교부장/전 연합뉴스TV ‘맹찬형의 시사터치’ 앵커
맹찬형 / 학산면 독천리 출생/연합뉴스TV 보도국장/전 연합뉴스 정치부장·국제뉴스2부장·통일외교부장/전 연합뉴스TV ‘맹찬형의 시사터치’ 앵커

정치와 외교의 무대에서 음식은 종종 의미있는 메시지를 담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정치인은 공식 오찬과 만찬에 내놓는 메뉴를 통해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진정성을 담아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도 하고, 상대에게 자신이 세운 원칙이나 규칙을 강제하기도 한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평양에서 특별히 배달해온 평양냉면은 전자에 해당할 것이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김 위원장은 평양냉면을 통해 문 대통령에 대한 존중을 표하고, 대결로 치닫던 남북관계를 화해·협력 모드로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셈이다. 

당시 판문점에 등장한 평양냉면이 크게 화제가 되면서 다음날부터 서울의 냉면 맛집들은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비록, 냉면 가격만 잔뜩 올려놓고 남북관계는 다시 경색국면으로 돌아가버려 쓴맛을 남기기는 했지만 말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 청와대를 찾는 손님들에게 대접했던 칼국수는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소박하고 서민적인 음식인 칼국수를 통해 청렴한 국정 운영을 하겠다는 YS의 의지를 보여주자는 뜻이었지만, 손님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종의 '강요'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대식가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시 야당 총재 자격으로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칼국수를 먹고 오면 항상 양이 차지 않아 당직자들과 함께 여의도 민주당사 근처에 있는 복집을 찾곤 했다.

음식은 또한 한국 정당정치의 변화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필자는 김대중 정부 2년차인 1999년 사회부에서 정치부로 자리를 옮겨 내리 10년 동안 민주당 계열 정당의 출입기자로 일하면서 '호남정당'이던 민주당이 '전국정당'으로 변신하면서 음식문화가 어떻게 변하는지도 지켜봤다. 당시 여의도 민주당 기자실에는 약 200여 명의 출입기자들이 하루 종일 정치권 관련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는데 간혹 지역구 의원들이 공수해온 특별한 향토음식이 제공됐다. 

김영란법이 제정되기 전이어서 심심찮게 특식이 제공됐고, 그 중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흑산 홍어였다. 출입기자들은 “옆방에 간식이 준비돼있으니 드시라”는 안내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와도 기사 쓰는 데 집중하느라 반응하지 않다가도 “목포 김홍일 의원실에서 올려온 흑산 홍어가 준비돼있습니다”라는 말이 들리면 경쟁적으로 찰진 홍어가 차려진 큰 책상 앞으로 옹기종기 모여들곤 했다. 호남 출신이 아닌 기자들도 민주당에 몇년 출입하다 보면 홍어 마니아가 되곤 했다. 싱싱한 생물 세발낙지가 제공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16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단 이낙연 당시 대변인이 지역구인 영광에서 은박지에 하나하나 포장한 백합을 공수해와 '조개의 여왕'이라며 소개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이때까지 민주당은 확실히 '호남당'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후 치러진 17대 총선을 계기로 변화가 시작됐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하고 부산·경남(PK) 지역에서도 국회의원 당선자가 배출되면서 음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홍어와 세발낙지의 빈도가 줄고, 그때까지 민주당 출입 기자들에게는 낯선 음식이었던 과메기가 간식상에 올랐고, 점심 메뉴로 부산 돼지국밥을 먹으러 가는 경우가 잦아졌다. 포항에서 상경한 원로당원이 정성껏 싸들고 온 고래고기의 생경한 맛과 식감은 지금도 혀끝이 기억하고 있다.

2008년 18대 총선을 마지막으로 현장 출입 기자를 끝내고 제네바 특파원을 거쳐 정치부 데스크로 자리를 옮기면서 더 이상 특식의 호강을 누릴 수 없었지만, 음식은 확실히 한국 정당정치 역사의 일부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여전히 언론은 특정 지역을 특정 정당의 '텃밭'이라고 쓰지만, 한국 정치를 덮고 있던 지역색은 확실히 엷어졌고 한 두가지 음식으로 정당을 특징짓는 '홍어정당' 식의 표현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그만큼 한 발짝 전진한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유권자들이 식탁에 차려진 다양한 음식을 마음 편하게 선택하고 골고루 맛볼 수 있는 정치가 펼쳐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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