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중 / 전남교육연구소 이사장 / 전남에너지고 교사
김기중 / 전남교육연구소 이사장 / 전남에너지고 교사

그곳에 가보았다. 꽃피는 산골, 내가 다녔던 분교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준 ‘폐교’라는 이름의 공간이 애잔하게 다가왔다. 교문 어귀 옅어진 시냇물 소리가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를 지탱한 채 친구들의 이름을 호명해주고 있었다. 운동장 좌측 ‘반공관’(反共館)이었던 일제식 교사(校舍)가 철거된 자리에는 키 작은 족구장이 잡초들을 이불 삼아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족구장을 돌아 옛 관사 자리에 들어서니 사금파리와 옹기 조각들이 반갑게 인사하며 그 시절 살림살이를 추억시켜 준다. 햇살 좋은 날 앙증맞은 사금파리와 돌맹이들을 모아다가 옹기종기 살림살이 놀이를 즐겼었다. 신랑들이 냇가에 가서 피리며 가재, 다슬기를 잡아 오는 동안 각시들은 쑥과 삘기를 뜯어다 찬거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소꿉놀이와 함께 하루해가 이울곤 했었다. 상념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리려니 사금파리와 옹기 파편들이 외친다. “지금은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 

20대 대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지금 후보들의 TV 토론 열기가 뜨겁다. 지금까지 토론회를 통해 약속한 그들의 정책이나 공약이 당선 후 잘 실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를 TV 앞에 모이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포장된 언사일망정 그들의 발언에서 한 표의 비교우위를 결정할 그 무엇을 찾아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역대 대선 토론회 때마다 유행어가 탄생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많은 유행어 중에서도 2002년 16대 대선 당시 한 후보의 외침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 IMF 극복되고 경제 엄청 좋아졌다는데, 서민들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은 현실을 반어적으로 표현하여 국민 유행어가 되었던 말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살림살이 좀 나아졌느냐’고 외쳐야 한다. ‘국민 여러분’이 아니라 나와 너, 서로에게 직접 물어야 한다. 코로나와 기후위기 시대에 참 살림살이가 무엇인지를 묻고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살림살이를 책임질 수 있는 후보를 식별해내야 한다.

참 ‘살림살이’란 무엇일까? 잊지 못할 스승님의 인문학 특강에 힘입어 ‘도덕경’을 언급하고자 한다. 흔히 ‘도덕경’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책을 윤리 도덕에 관한 책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오히려 윤리 도덕의 허구성과 폐단을 지적하고 있는 책이다. 오늘날 판본만도 수백 권이 존재한다는 이 책의 중심 사상은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일 것이다.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무(無)의 행위’를 말하며, 이는 자기 자신을 무와 같이 비운 상태에서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또한 ‘자연’은 자연계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존재물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참된 생명활동’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사기그릇이나 옹기그릇 등의 쓰임새가 허(虛) 또는 무(無)에서 나오듯이 우리 자신을 사람답게 해 주는 가장 큰 쓰임새는 바로 사람의 무(無)라고 할 수 있는 빈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위’는 지배욕과 장악의 의지가 없이 타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행위이며 또한 타자의 참된 생명 활동, 즉 자연(自然)을 돕는 행위인 것이다. 결국 ‘無爲自然’이란 ‘살림살이’를 지향하는 행위이며, 살림살이란 바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생활화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새롭다.

마르틴 부버(1878~1965)에 의하면, 인간은 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세계(사람, 자연, 정신적 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두 가지이다. 바로 ‘나와 너’의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다. 현대인들의 인간성 상실의 근본 이유는 ‘나와 그것’의 관계 맺음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부버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려면 ‘나와 너’의 관계 맺음이 삶의 주된 모습이 되어야 하며, 여기에서 ‘너’란 단지 사람을 뛰어넘어 동식물 등 모든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상대가 누구이건, 무엇이건 간에 성심성의껏 대할 때 상대는 나에게 ‘그것(Es)’이 되지 않고 바로 ‘너(Du)’가 될 수 있다는 부버의 외침을 우리들 각자, 특히 선출직에 나서고자 하는 모든 후보들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면 교육 부문의 살림살이는 좀 나아졌을까? 교육이야말로 코로나와 기후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지속 가능한 인류공동체의 존속, 다시 말해 ‘살림살이’를 위한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우리 교육의 살림살이가 좋아졌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입시경쟁과 대학서열체제, 이로 인한 학벌주의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와 참모진들은 물론이거니와, 누구든 ‘교육대전환’을 외치고자 한다면 지난해 11월 유네스코에서 발표한 ‘교육을 위한 새로운 사회 계약’이라는 제목의 보고서 서문부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육 시스템은 단기적 특권과 안락함이 장기적 지속 가능성보다 더 중요하다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왔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성공, 국가적 경쟁 및 경제 발전의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상호의존성을 이해하고, 서로 지구를 돌보며 연대하는 것을 훼손해 왔습니다. 교육은 집단적 노력을 중심으로 우리를 통합하고, 사회, 경제 및 환경 정의에 기반을 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지속 가능한 미래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지식, 과학 및 혁신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