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책임제 헌법 15분만에 대통령제로 수정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책임제로

한국민주당 중진들은 그날 밤 한민당 위원장 김성수의 집에 모여 헌법문제를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헌법 초안을 재명일(再明日)에 내놓기로 했으나 100여 조나 되는 헌법초안에 손을 댈 수 없어 그대로 내놓아 본회의에서 토의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일단 본회의에 내놓으면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제로 뜯어고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렇게 되면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앉힐 수 없게 되었다.

이승만 박사의 폭탄선언으로 헌법기초위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번민하고 있었는데, 신익희가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발언에 나섰고 이어 두뇌회전이 기민한 낭산이 정치적 타협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낭산이 ¨내가 수시간 이내에 고쳐놓겠소이다.¨라고 제안하자 김성수는 ¨낭산! 한 나라의 헌법을 어떻게 수시간 이내 고쳐놓겠단 말이오?¨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하였다.

그랬더니 낭산이 ¨그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므로 내가 30분 이내에 고쳐놓겠소.¨ 하고는 가장 핵심적인 몇 군데를 만년필로 15분내에 고쳐놓고 ¨이만하면 되겠소.¨하고 자신있게 단언하였다. 그랬더니 한민당 위원장 김성수가 ¨낭산이 이렇게 고쳐놓았지만 기안자인 유진오 교수를 불러다 의견을 들어보아야겠소!¨ 하면서 유진오를 청해올 것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자동차를 타고 청량리 근처에 사는 유진오를 데려왔다. 김성수는 ¨낭산이 이와 같이 헌법을 고쳐놓았는데, 그대의 의견은 어떻소?¨라고 하니, 유진오는 ¨원칙적으로는 반대하지만 이와 같이 하면 낭산 선생의 말대로 문장의 연결은 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낭산은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책임제로 수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정부수립 눈앞에 두다

결국 한국의 헌법은 최하영이 초안 작성한 내각책임제에 유진오의 의견을 반영한 인권조항이 첨가되고, 최종적으로는 낭산이 대통령책임제로 수정한 것이었다. 드디어 헌법기초위원회에 나가 대통령책임제로 번안결정을 하였고, 그대로 기초하여 통과되었다.

국회본회의에서는 신중한 토의를 거쳐 드디어 7월12일 통과, 7월17일 공포하게 되었으니 그 날이 바로 제헌절이다.

이렇게 해서 내각책임제로 되었던 헌법초안이 하룻밤 사이에 대통령중심제로 변경되었다. 이에 대해 조봉암은 끝내 반대했다. 나중에 그로 인해 낭산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는 불가피한 상황 타계책이었다.

즉, 대통령중심제는 이승만 박사, 조병옥, 허정, 낭산 등 수많은 인사들이 찬성하였으며, 실정에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후의 수많은 사건발생과 민주당 정권의 내각책임제하의 혼란상이 잘 입증해준다. 극히 혼란했던 시기에 대통령중심제라는 강력한 정부가 아니었더라면, 정부수립 후 발생한 여러 가지 복잡다단하고 어려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제헌국회 때의 국회프락치사건, 공산당폭동사건, 정치적으로 혼란한 사건 등을 처리하지 못하고 정부 그 자체가 넘어가는 고경(苦境)을 겪고 말았을 것이다.

8·15 해방을 맞이한 후 꼬박 3년동안 무수한 파란곡절과 암살과 음모와 혼란이 지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정부수립을 눈앞에 보게 되니, 낭산은 다만 감격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낭산 국무총리 물망에 올라

드디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선포가 있었다. 선포식장에는 이승만 박사의 취임사와 20세기 최고의 명장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의 축사가 있었다. 이승만 박사는 수십년 동안 해외에서 망명생활의 감회가 어린 노혁명가다운 연설을 하였으며, 맥아더 원수는 만일 대한민국이 공산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그의 조국 캘리포니아주를 방어한다는 정신으로 한국을 사수하겠다는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

이에 앞서 내각을 조직하게 되었는데, 그 각료들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겸 국방장관 이범석, 재무장관 김도연, 문교장관 안호상, 농림장관 조봉암, 상공장관 임영신, 사회장관 전진한, 보건장관 구영숙, 교통장관 민희식, 체신장관 윤석구, 무임소 장관 지청천, 법제처장 유진오씨 등이었다.

사실 8·15 해방 직후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된다고 예상했을 때 국무총리감으로 6명의 인물이 물망에 올랐다. 낭산과 더불어 송진우,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 지청천씨 등이었다. 송진우는 한민당 당수로서 지도력이 뛰어나고 포용력이 있으며 패기있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안목을 갖고 있었으며, 민족진영의 지도자로서 국내에서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송진우는 8·15 해방되던 1945년 12월30일 피격을 받아 타계하였다. 그리하여 3년 후 1948년 내각구성에서 국무총리감으로 논외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신익희는 국무총리보다는 국회의장이 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인정되어 국무총리 지명에서 제외되었고, 지청천 장군은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항일 투쟁한 인물인데 정치, 행정, 국내정세에 밝지 못해 제외되었다.

또 조소앙은 신익희, 엄항섭과 함께 임시정부의 3재로 알려진 인물로 삼군주의를 주장한 사상가이고, 국회의원선거에서 조병옥 박사를 물리치고 승리한 인물인데, 이승만 박사보다는 임정에 더 가깝고 남북협상파여서 이 박사가 제외시켰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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