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재 홍 /서호면 몽해리 아천출신연합뉴스 뉴스통신진흥회 이사  전 경기대 교수(정치학 박사) 전 KBS제주방송 총국장
윤 재 홍 /서호면 몽해리 아천출신연합뉴스 뉴스통신진흥회 이사  전 경기대 교수(정치학 박사) 전 KBS제주방송 총국장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국민은 법을 어기면 누구나 평등하게 처벌을 받는다. 모든 법의 집행은 경찰과 검찰, 죗값을 치루기 위해서는 법원의 판결로 진행된다.

1998년 제15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지 6개월이 지난 때였다. 필자는 KBS 보도본부 9시 뉴스 고발 프로그램 ‘현장추적 1234’를 전담 취재하는 사회부 기동취재부 부장이었다. 검찰로 비교하면 특별한 사건 수사를 전담하는 특수부와 비슷한 부서였다. 이 부서는 3~40대 젊고 취재력이 뛰어난 기자와 카메라 기자 등 7~8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당시는 KBS 9시 뉴스에 1주일에 2~3번 나가는 ‘현장추적 1234’의 기사 내용이 무엇인지가 큰 관심사였다. 왜냐하면 이 방송이 나가면 취재 대상은 모두가 구속되거나 국민의 지탄을 받는 대상이 되어 시청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당시 고발 내용으로 톱밥과 물감으로 만든 가짜 고춧가루, 녹즙기에서 나오는 쇳가루, 물을 타서 제조한 가짜 우유, 암 환자의 특효약으로 소문난 화장터의 사람 뼛가루 밀매 현장 고발 등이 시청자들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점차 고발뉴스 취재가 어려워지면서 고발대상을 찾는 데 많은 고민이 되었다. 그 때 필자가 KBS 제주방송총국 보도국장 당시 고교 선배인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 관사를 놀러간 기억이 떠올랐다. 제주검사장과 법원장의 관사는 이웃으로 나란히 있었는데 모두가 2천640㎡(800평)이 넘었고 푸른 잔디 위에 골프 연습장까지 갖춰져 있는 2층 호화관사가 있어 놀란 적이 있었다. 이 넓은 호화관사에는 검사장과 가사도우미, 그리고 개 한 마리 등 세 식구만이 살고 있었다. 기자로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따라서 취재기자들에게 전국의 지방법원장과 검사장 관사의 취재지시를 내렸다.

예상대로 청주의 법원장과 검사장의 관사는 대지가 3천300㎡(1000평)로 제일 컸고, 대부분 다른 지방도 비슷했다. 법을 집행하는 지방법원장과 검사장이 국민의 세금으로 호화롭게 산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 후 본격적인 기자들의 취재가 시작되었다. 

취재가 끝나고 방송을 위한 편집이 마무리될 무렵에 여기저기서 방송중단을 요구하는 전화들이 빗발쳤다. 당시 정치부 출입기자로 활동할 때 국회의원을 지낸 박상천 법무장관과 김태정 검찰총장, 그리고 제주검사장에서 수원검사장으로 옮긴 고교 선배 등이 필자에게 직접 전화를 해 방송 보도를 보류할 수 없냐고 부탁했다. 

필자는 “이미 취재기자들이 취재와 편집까지 끝났고 만일 이 보도가 안 나가면 기자들 전체가 들고 일어난다. 새 국민 정부에서도 새롭게 과감히 추진하는, 정부의 실적을 올리는 큰일을 하는 것이니 오히려 현 정부도 국민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더구나 나중에는 법원과 검찰을 출입하는 KBS 기자들까지도 방송이 안 나가거나 부드럽게 나가길 바라는 분위기를 조성했으나 이러한 거대한 로비의 장벽을 뚫고 방송이 과감하게 나갔다.

9시 뉴스의 ‘현장추적 1234’가 방송되면서부터 여기저기서 권위주위적인 전국의 지방법원장과 검사장들의 호화관사를 고발하니 “시청료가 아깝지 않다” “법원검찰 호화관사 고발뉴스가 모처럼 국민들을 통쾌하게 해줬다” “역시 KBS답게 계속 부정과 부패, 권위적인 현상을 낱낱이 고발해주길 바란다”며 격려 전화가 계속 이어졌다. 

KBS에 보도가 되면서 법원과 검찰은 긴급회의를 소집해 권위주위적인 분위기를 없애려고 호화관사를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판사와 검사들을 위한 사택을 지어 그동안 불편했던 판·검사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었다. 판·검사들이 정의와 원칙에 따라 법원과 검찰의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하도록 도움을 준 셈이다. 23년이 지난 지금도 법원과 검찰의 사건 보도를 볼 때마다 당시 어렵게 취재했던 지방법원장과 검사장의 호화관사 취재 생각이 가끔 떠오른다.

국민의 세금을 올바르게 쓰도록 한 방송기자 데스크로서 큰 보람과 자부심이 추억으로 맴돌아 흐뭇한 기분을 아직도 감출 수 없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