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는듯하던 무더위도 세월의 흐름에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조석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새벽녘에는 열어 둔 창문 틈으로 한기가 느껴지는 바람이 들어옵니다. 이젠 열대야도 사라졌고, 에어컨 틀 일도 없어졌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심경이 복잡한데, 세월은 무심하게 휙휙 지나갑니다.
한기를 느끼며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달콤하고, 구수한 냄새가 집안에 동동 떠다닙니다. 집사람이 팥과 강낭콩을 삶고 있습니다. 오늘 점심은 팥 칼국수를 만들어 먹자고 합니다. 엔돌핀이 솟구칩니다.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음식이 팥 칼국수인 걸 알고 집사람이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날마다 밑반찬, 국 끓이기, 여러 가지 특식을 만들어 주는 제가 고마워 오늘 아침은 집사람이 나선 걸로 보여집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걸 배려(配慮)라고 할 겁니다. 늙어가는 마당에 부부가 서로 아껴주고 보살펴 주는 말이 바로 배려입니다. 자신의 짝을 걱정해서 보살피는 말이 배려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시작은 집사람이 했지만 팥 칼국수를 만드는 일은 제 일이 됩니다. 삶은 팥과 강낭콩은 믹서기에 갈아 국물을 만들고, 면을 삶습니다. 보글보글 국물이 끓으면 면을 넣고 6~7분 뭉근하게 끓입니다. 진하고 고소한 팥 칼국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소금 간을 해 한 숟갈 맛봅니다. 아, 좋다!! 혀가 춤을 추려 합니다. 문득 60년대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시던 팥 칼국수가 떠오릅니다. 모든 게 궁핍해서 어려웠던 시절 60년대. 그 땐 가뭄과 홍수도 자주 들이 닥쳤더랬습니다. 초근목피는 아니었지만 참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그 때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과 협상을 해 원조 물품으로 밀가루를 받아왔습니다. 우리 세대 이 밀가루로 연명하지 않은 사람들은 극소수일 겁니다. 어머니와 저는 밀가루를 얻기 위해 공사판에 나갔습니다. 지금 기억으로 신북 명동 어름에 저수지 댐을 막기 위한 공사였습니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삼태기에 흙을 퍼담아 우리 구역에 쏟아붓고, 전 막내 여동생을 업고 우리 구역을 지켜내는 일을 했습니다. 이글거리는 햇살 속에 어머니와 전 땀에 절어 일을 했습니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김없이 어머니 머리 위에는 밀가루 포대가 얹어 있었습니다. 피곤하고 힘 들었어도 골방에 한 포 한 포 쌓여가는 밀가루 포대를 보면 정말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서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는 여름 날이었습니다.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떼로 몰려 다녔습니다. 마당 한쪽에 만들어 놓은 화덕 위 가마솥에서는 빨간 팥물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군침 도는 팥물 냄새가 온 집안을 떠다녔습니다. 어머니는 밀가루를 반죽해 홍두깨로 반죽을 밀어 칼국수를 만듭니다. 어머니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고맙고 아름다웠습니다. 어느새 입에는 군침이 돌고 행복한 기분이 콩콩콩 온몸을 헤집고 뛰어다녔습니다. 어머니와 제 땀과 고통이 밀가루와 팥이 만나 제 어린 날, 한 귀퉁이 추억을 살찌웠습니다. 그래서 팥 칼국수는 아픔이면서도 제 어린 날 소울푸드인 것입니다. 행복합니다. 팥 칼국수 한 그릇에 행복감이 차오릅니다.
UN이 발표하는 인류 행복지수에서 세계 20여 개 국가가 해마다 상위권을 차지합니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인데 그 중 동화의 나라로 알려진 덴마크의 국민들이 가장 행복한 국민들로 손꼽힙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문화에 ‘얀테의 법칙’(Jante Law)이란 게 있답니다. 이상적인 복지나 바람직한 교육 시스템이 아니라, 덴마크의 작가가 쓴 소설에 나오는 10개의 규칙이 얀테의 법칙인데 이것이 절대적으로 국민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답니다. 스스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내가 더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더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무엇을 하던지 다 잘 할 것이라고 장담하지 말라, 다른 사람을 비웃지 말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 이 말들을 꽤 뚫고 있는 중심 생각은 아마 ‘우월감’과 ‘열등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많든 적든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보며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이것들로 인해 고통과 낙심과 좌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덴마크 국민들이 행복한 이유는 남들보다 잘 나거나 부유해서가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존귀한 존재’라는 가치관을 바탕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마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요즘 신문과 뉴스를 보면 우리나라 정치판은 돗데기 시장 같습니다. 더욱 우리나라를 이끌겠다고 나선 이들 면면과 그들의 행태를 보면 가관입니다. 서로들 잘 나고, 서로들 자신이 아니면 안된다고 악다구니를 부립니다. 상대방을 배려한다거나 더욱 국민들을 배려한다는 믿음은 어디에고 보이지 않습니다. 법이 자신과 맞지 않으면 그것마저도 시비를 겁니다. 한마디로 뻔뻔하고, 염치가 없습니다. 옛말에 예의와 염치를 알아야 하는데, 그 중 하나를 모르면 기울고, 둘을 모르면 위태로워지고, 셋을 모르면 뒤집어 지며, 넷을 모르면 파멸을 면치 못한다는 옛 성현의 말씀이 생각나는 시간입니다. 이런 험악한 세상에선 더욱 자신을 성찰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비록 부부간일지라도 서로 존중하고 배려한다면 이곳이 천당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