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 더위 벗 삼아 다섯이랑 밭 붉은 고추를 딴다. 챙 넓은 모자와 마스크로 무장하기가 무섭게 열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땀샘이 일제히 포문을 열자 어느새 온몸은 땀범벅이다. 병상의 수액처럼 이마에 맺힌 땀들이 두 눈을 타고 고추 위로 뚝뚝 떨어진다. 허나 계절의 조화를 어찌하랴. 입추 지나고 나니 어김없이 가을인가. 어디에선가 하늬바람이 불어온다. 땀방울이 점차 수그러들고 눈앞이 트이니 정신이 맑아진다. 온통 빨간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저 고추들의 행렬이 장관이다. 붉은 열기에 고무되어 가장 크고 튼실한 녀석에게 ‘싹둑’ 가위를 대었다. 한 움큼의 듬직한 홍고추 하나, 룰루랄라 집어 들고 보니, 아뿔싸! 뒷면은 아직도 초록빛이다. 차분히 전부를 보지 못하고 성급하게 한쪽 면만 보았다고 깨닫는 순간, 지나온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젊은 시절, 소중한 시간들을 함께 했던 사춘기 어린 제자들의 모습을 한 명 두 명 떠올려본다. 눈물이 핑 돈다.
고추 농사는 사람 농사와 닮았다. 사내아이에 한정되었다지만, 출생하자마자 집집마다 붉은 고추를 내걸었던 풍습도 의미심장하다. 그때 그 시절, 고추 농사에서 탄저병 방제만이 유일했듯이, 영·유아에게도 천연두 예방접종 외에는 별다른 감염병 대책이 없었다. 허나 지금은 어떠한가. 탄저병 외에도 시들음병, 원형반점병, 역병, 풋마름병, 궤양병, 노린재와 진딧물 등 수십 가지 병충해 방제가 요구된다. 사람도 태어나자마자 간염, 결핵 예방접종을 필두로 디프테리아와 파상풍, 뇌수막염, 소아마비, 폐렴 등에 대한 주기적이고 정기적인 접종이 의무화되어있다. 다 자란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한 차례 붉은 고추를 따낼 때마다 곧바로 방제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 밭의 병해충이 이웃 밭으로 옮겨가고, 결국 온 동네 밭들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평생 동안 예방접종 없이는 살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다. 게다가 이제는 코로나19로도 모자라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에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신세가 되었다. 쉽게 타인에 의해 감염될 수도, 타인을 감염시킬 수도 있다. 운명 공동체인 것이다.
고추밭에서 운명 공동체 우리 교육 현실을 아프게 절감한다. 인디언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의 노력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어린 고추 묘목 또한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이랑 전체가 함께 이중 삼중의 줄로 서로를 묶으며 단단히 결속해야 한다. 그래야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거나 부러지지 않고 강한 뿌리와 튼실한 열매를 보장받을 수 있다. 협력과 연대를 통한 상생과 공존의 원리인 셈이다. 그 속에서 한여름 폭염과 폭우, 온갖 병충해를 견디면서 함께 부대끼다 보면 어느새 훌쩍 큰 나무로 자란다. 이제 줄 속의 세상은 움직이기조차 힘든 좁은 공간이 되고 만다. 그러나 놀랍기만 하다. 빽빽한 밀도 속에서도 어느 녀석 하나 자리를 독차지하거나 끼리끼리 나누어 갖기 위해 무리를 짓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가 비좁은 공간을 공유하며 기꺼이 곁을 내준다. 각자의 크기에 따라 속을 알차게 채워가면 그만이다. 과연 나는 어떠한가. 아직도 시험 성적으로 아이들을 평가하거나 한쪽 면만 보고 쉽게 판단하고 있지는 않는지, 흔히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가는 아이, 잘산다는 집 아이에게는 은연중 특권의식을 심어주지는 않았는지, 가정환경이 어렵거나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을 알게 모르게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여전히 잘못된 교육 현실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는 무엇인지 진지하게 따져볼 일이다.
최근 내년 대선후보 경쟁 과정과 재벌총수 봐주기식 이중잣대 사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듯이, 검찰 집단과 관료사회, 사법부, 언론계 등에 퍼져있는 소위 엘리트주의와 차별·특권 의식도 따지고 보면 잘못된 교육 관행과 제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작금의 일이 아니라 우리 공교육이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할 공동체 건설과 유지, 계승을 위한 본래의 사명을 더이상 수행하지 못한 채, 오로지 개인의 입신양명과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시점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시험 성적에 비교우위를 보이며 소위 명문대학을 거쳐 그 어렵다는 고시에 패스하는 순간, 엘리트주의와 특권의식 또한 가족 이기주의와 결합되어 공고해져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차원이 아닐 것이다. 바로 ‘학벌사회와 대학의 서열구조’가 우리 교육 문제의 뿌리일 것이다. 고등교육이 특권 대물림이나 신분 상속의 배타적 상품이 되다 보니 당연히 초·중등교육은 이를 위한 보조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초·중등 대안교육 실험과 혁신학교 운동이 결국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지속적으로 공감대를 넓혀 온 ‘대학무상화·평준화’ 운동과, 이를 위한 고등교육법 제정, 반값 등록금 실현, 수능자격고사화와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 구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이는 단순한 교육 문제를 뛰어넘어 우리 사회 평등과 분배 정의를 실현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