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홍 /  서호면 몽해리 전 목포시 교육장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전 목포석현초 교장
이 기 홍 /  서호면 몽해리 전 목포시 교육장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전 목포석현초 교장

요즘 은퇴한 스포츠 스타들이 각종 연예 프로에 출연해 우리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 중에는 오히려 현역 때보다도 우리의 관심을 더 받는 스타도 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웃음은 대부분 현역시절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나는 그 중에서도 마라토너 이봉주에게 유독 관심이 간다. 잦은 출연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어색한 표정, 웃음너머 언뜻언뜻 보이는 어떤 진중함이 그의 현역시절의 삶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선수 시절 이봉주의 모습은 초라함 그 자체다. 쪼글쪼글한 얼굴, 덥수룩한 턱수염, 듬성듬성한 머리카락, 마른 명태 같은 몸, 이런 것이 이봉주에 대한 기억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봉주에 대해 경의에 가까운 애정을 갖는 것일까. 그것은 한 말로 국민의 기대를 받는 마라토너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운동 선수들이 그렇듯 몇 번의 우승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이후의 삶이 보장되면 극한 직업이나 마찬가지인 운동을 그만두기 마련인데, 이봉주는 그렇지 않았다. 비록 삶의 수단으로 마라토너의 길을 택했지만,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된 자신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많은 것을 희생해 가며 혼을 불살랐다. 현역시절, 이봉주의 발은 상처투성이였다. 성할 날이 없었다. 모과처럼 울퉁불퉁하고, 발톱도 군데군데 피멍이 들어 새까맣게 되곤 했다. 한번 대회에 나가 완주하고 나면, 여기저기 물집이 잡혀 잘 걸을 수도 없었다. 

마라톤은 발-발목-정강이-무릎-허벅지-골반에 끊임없이 충격을 주는 반복운동이다. 지루하고 단조롭다. 양 발에 26개씩 있는 뼈와 골반, 발목에 이르는 5개의 뼈가 체중의 두세 배 무게를 이겨내야 한다. 날숨과 들숨이 리듬을 이룰 때서야 비로소 온몸이 완주라는 하나의 노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극한 운동이다. 그래 마라톤을 고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봉주가 겨우 이름 석 자를 내민 것은 1989년 제70회 전국체육대회 육상 남고부 1만 m에서였다. 1위는 황영조가 차지했다. 이봉주는 3위로 턱걸이 했다. 황영조에게 92.64m(17초)나 뒤졌다. 이봉주는 갈 데가 없었다. 대학이나 실업에서도 불러주지 않았다. 1990년 천신만고 끝에 서울시청에 입단했다. 이봉주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1996년 3월 에틀란타 올림픽 티켓이 걸린 동아국제마라톤(경주)에서 2위에 오르면서였다. 이봉주는 풀코스 도전 15번 만에 애틀랜타 올림픽 2위에 올랐다. 그 뒤로도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3번(2000년 시드니 24위, 2004년 아테네 14위, 2008년 베이징 28위)이나 더 도전했지만 올림픽 금메달에는 실패했다. 

이봉주는 너무 많이 뛰었다. 아무리 세계적인 선수라도 많아야 15번쯤 완주하고 나면 은퇴하는데, 이봉주는 선수생활 19년 동안 평발이라는 신체적 조건을 극복하고 공식대회만 41회를 완주했다. 절구 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 듯, 다시 그 바늘로 우물을 파듯 미련하게 또 미련하게 달리고 또 달렸다. 먹이를 찾아 하루 40㎞ 이상 달렸던 네안데르탈인처럼 뛰고 뛰고 또 뛰었다. 

그래 이봉주는 나에게 마라토너 이상이었다. 나는 언제나 성실하고 묵묵하게 땀 흘리는 그에게서 힘을 얻었다. 주저앉을 듯하면서도 주저앉지 않고, 쓰러질 듯하면서도 다시 일어나 세계정상에 노크했던 이봉주, 당시 좌절과 기다림으로 지쳐있던 나에게 영웅처럼 비춰졌다. 그래 지금도 이봉주가 나오는 예능프로를 나는 즐겨본다. 요즘 척수지주막낭종이라는 희귀병으로 출연을 못하는데 하루빨리 나아 방송에서 다시 보기를 기대한다. 이봉주 말처럼 인생은 마라톤이고, 마라톤의 목표는 우승이 아니라 완주이기에 나는 오늘도 호흡을 가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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