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77) 후대까지 이어지는 마한의 정체성(上) 

시종 태간리 장고분 / 화려했던 마한 왕국의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반남 고분군-옥야리 고분군-장동 방대형고분–쌍무덤–태간리 장고분–복암리 고분군. 사진은 왜색(倭色)이 짙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독특한 양식의 무덤이 확인된 시종 태간리 장고분 발굴현장.
시종 태간리 장고분 / 화려했던 마한 왕국의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반남 고분군-옥야리 고분군-장동 방대형고분–쌍무덤–태간리 장고분–복암리 고분군. 사진은 왜색(倭色)이 짙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독특한 양식의 무덤이 확인된 시종 태간리 장고분 발굴현장.

지역의 정체성이 담겨야  

지난 6월 20일, 필자는 전남외국어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김철민 선생과 함께 나주·영암 일대의 마한 유적을 답사하였다. 나주 박물관 – 반남 고분군 – 시종 마한역사문화공원 – 옥야리 고분군 – 장동 방대형고분 – 쌍무덤 – 태간리 장고분 – 복암리 고분군으로 이어지는 답사 일정이었다. 화려한 마한 르네상스를 건설한 마한 왕국의 모습을 확인하였다. 김철민 선생과 필자는 해남고등학교의 김동석 선생과 함께 전남교육청의 자료집을 제작하고 있다. 2021년 개발하려는 책은 ‘마한’이다. 실제 역사 유적지를 답사하다 보면 연구실에서 느끼지 못한 역사적 영감(靈感)이 떠오를 때가 있다. 점심 식사하러 들른 기찬랜드에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보기 좋았다. 영암의 미래 발전의 동력은 관광산업에 있다고 하겠다. 역사와 자연이 공존하는 영암은 천혜의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영암의 정체성이 깃든, 시대에 맞는 관광상품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김철민 선생도 여러 차례 이 지역의 마한 고분을 답사하였지만, 필자의 설명을 들으니 훨씬 남다른 느낌이 온다고 기뻐한다. 일반인은 물론 문화해설사·교사·학생 등에 대한 마한 체험교육을 통해 이해를 새롭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한 답사길을 영암군의 지원으로 계획을 수립·추진 중이다. 코로나19의 엄중한 상황이라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철저한 방역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믿는다. 너무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나주공공도서관에서 2021 도서관 인문학 사업의 일환으로 ‘마한역사문화’를 주제로 5주 연속 특강을 하고 있다. 엊그제도 나주시민 20여 명이 대회의실을 매운 채 4주째 강의가 있었다. 무려 120분 동안 쉬는 시간도 없이 하는 강의에도 조는 학생(?) 한 명 없이 집중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에서 마한을 통해 우리 지역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민들의 간절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강이 끝난 후 이루어진 대담에서 나주와 영암에서 각각 치르고 있는 마한축제의 통합문제 얘기도 나왔다. 이미 전라남도에서 나주와 영암 두 지역에서 각자 추진되고 있는 ‘마한축제’를 통합하기 위한 용역을 발주하였기 때문에 조만간 축제 통합문제는 결론이 날 것이라고 믿는다. 필자가 염려하는 것은 축제 통합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축제에 마한의 정체성을 담는 일은 축제통합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견훤도 마한의 정체성 활용 

필자는 지난 호에 마한의 상징으로 ‘응준’(鷹隼, 매)을 살펴야 함을 얘기하였다. ‘응준’이 전라도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아직도 ‘소도’(蘇塗)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마한의 정체성은 마한이 역사 무대에 사라진 후에도 후대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이는 그만큼 마한의 정체성이 강고함을 말해준다. 후대에 이어진 마한의 정체성을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다시 요약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영산 지중해를 중심으로 전개된 포용성과 개방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마한 지역의 고유한 문화특질은 영산강식 토기라는 지역의 독자적 정체성으로 발전하였다. 용맹한 마한 사람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먼저 양보하였고, 금은보다 옥을 사랑하였다. 이러한 마한의 독특한 정체성은 분립 상태에 있으면서도 상호 공존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깊다. 따라서 비록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백제와 대등한 단계에서 통합할 수 있었고, 그 이후에도 그 정체성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신라에 복속된 뒤에도 그 정체성은 더욱 강고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통일신라 말 견훤은 이러한 마한의 정체성을 후백제를 건국할 때 이용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마한의 정체성이 이 무렵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견훤 전에 “견훤이 나라를 세울 때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주(州)의 백성들이 환영하고 고마움을 드러냈다.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00여 년이 되었다. …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어야 하지 않겠는가?”라 하여, 견훤이 완산(전주)에서 나라를 세우게 된 배경이 나와 있다. 다분히 완산 주민들을 의식하는 발언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견훤이 백제 계승의식을 분명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국의 시초를 마한에서 찾고, 마한의 중심지인 금마산에서 백제가 개국하였다고 한데서 마한역사 인식을 분명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견훤이 마한에서 백제로 이어지는 역사 인식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견훤 자신의 인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옛 마한 지역인 무진주·완산주 지역민들의 역사 인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마한 중심의 역사의식이 견훤 시기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이 지역에 마한의 정체성이 뿌리내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한의 정체성은 백제와 마한이 통합된 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마한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면서까지 왕권을 확립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마한계의 강한 반발로 국호 변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를 시도하며 마한의 무강왕 건국 설화를 무왕의 탄생 설화로 변용하면서까지 마한계를 포용하려 하였다. 이러한 인식이 선덕여왕 때 신라에서는 백제를 마한의 별칭인 ‘응유’로 표현하게 하였다.

그러나 무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마한계로 대표되는 지배 세력을 억누르려는 정책을 썼다. 의자왕이 100여 명 이상의 귀족을 죽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라 여겨진다. 이에 대한 귀족 곧 마한계의 반발은 정치적 혼란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백제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백제 멸망 당시에도 옛 마한 지역민들이 가지고 있는 마한의 정체성은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 융의 묘지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다루겠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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