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76) 전라도 정체성의 상징 ‘응준’(下)
2020년 6월 9일 제정된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법률에서 위임된 사항과 그 시행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 역사문화권정비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지난 6월 1일과 6월 4일 제정 공포되어 6월 10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번에 제정된 시행령과 시행규칙의 주요 내용은 ▲역사문화권정비위원회 구성·운영 ▲역사문화권정비 기본계획·시행계획·실시계획 관련 사항 ▲사업시행자 관련 사항 ▲특별회계 관련 사항 ▲개발이익의 재투자 관련 사항 등이다.
특별법은 단순히 단위 문화재 중심 보존관리 위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역사문화권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여 정체성을 찾고, 역사문화권의 역사문화환경을 정비·육성하여 지역의 문화발전과 지역경제 활성화 등 지역 발전의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다. 말하자면, 문화유산을 통해 그 지역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이를 지역 발전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마한사를 통해 크게는 한국사의 작게는 전라도의 정체성을 찾아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응준’의 주제를 살피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지난 호에 백제의 별칭이라 알려진 ‘응준’(鷹隼)을 마한 남부연맹의 별칭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는 근거를 조금 더 살펴보겠다.
‘응방’의 중심지역 나주
신라의 별칭이 ‘닭’을 의미하는 ‘계림’인 것처럼, ‘응준’의 중심지였던 영산강 유역에도 ‘매’와 관련된 사회, 문화적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곳이 ‘응준’의 핵심 지역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나, 마한 남부연맹 지역에 해당하는 차령이남 여러 곳에 ‘매’와 관련된 기록이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반증해주고 있다.
고려 충렬왕 원년 ‘응방’(鷹坊)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 그 중심이 나주 장흥부 관할이라고 한 증보문헌비고 기록이 주목된다. 응방은 잘 알고 있듯이 원 간섭기에 ‘해동청’(海東靑)으로 유명한 고려의 ‘매’를 공물로 바치기 위해 설치된 관청이었다. 그 응방 중심 지역이 나주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전라도 지리산에 ‘응준’이 서식하여 매년 공물로 진상을 한다”고 하여, ‘매’의 산지로 전라도 지역을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 지역과 ‘매’가 관련 있음을 알려준다. 지금도 전북 진안 지역에서 ‘매’를 이용한 꿩 사냥 전통이 남아 있는 것도, 전라도 지역과 매와 관련된 얘기가 오랜 전통으로 남아 있음을 분명히 해준다. 이렇게 보면 ‘매’ 곧 ‘응준’이 마한 남부연맹을 상징하는 맹금류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한편, 일본서기에도 한반도의 ‘매’를 이용한 사냥 풍습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은 백제 때 사실이라고 되어 있지만, 전라도 지역이 ‘매’ 주 생산지이고 마한 남부연맹의 상징이었다고 하는 사실과 인덕천황 43년(455년) 시기의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백제 이야기라기보다는 마한과 관련된 사실을 후대에 백제의 것으로 오인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서기 기록은 마한의 매사냥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위 기록에 뒤이어 “백제의 풍속에 이 새를 구지(지금의 매)라 하였다(百濟俗號此鳥曰俱知(是今時鷹也)”라고 한 기록이 주목된다. 말하자면 백제에서 매를 ‘구지’라 했다는 것인데, 이 기록이 마한 시기의 사실이라 할 때 마한에서 ‘매’를 ‘구지’라 했음을 알 수 있다.
‘매’의 상징 마한 남부연맹
‘매’를 ‘구지’라고 부르는 전통이 16세기 중엽 최세진이 쓴 ‘훈몽자회’에 ‘매’를 ‘구겨내’라고 적고 있는 데서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도 ‘매’를 그들의 고유어로 ‘구지’ 또는 ‘구지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일본에서 백제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구다라’(クダラ)라고 하는 것을 익히 아는 사실인데, ‘구지’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매’를 뜻하는 ‘굳’에 ‘나라’라는 의미를 보태면 ‘구다라’라고 하는 용어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매와 관련 있는 곳은 백제가 아니라 마한 지역이었다. 일본 고대문화 성립에 기여한 도래인 대부분이 마한계, 특히 영산강식 토기로 상징되는 영산강 유역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구다라’는 ‘백제’가 아닌 ‘마한’을 총칭하는 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구다라’가 백제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던 것은 마한과 백제와 통합된 이후 마한계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처럼 마한 지역이 매를 상징으로 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백제가 5방으로 지방 편제를 할 때 남방에 구지하성(久知下城)을 두었다는 중국 북사(北史)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전라도 지역에 해당하는 곳을 ‘구지하성’이라고 한 것은 이 지역이 ‘응준’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전북 김제에 해당하는 금구현도 ‘구지지산’이라고 하는 등 마한 남부연맹 여러 곳에 ‘구지’라는 지명이 많다는 것도 이러한 추론의 방증이 될 것이다.
결국, 6세기 무렵까지도 ‘사슴’으로 상징되는 부여계인 백제 중심의 마한 북부연맹과 ‘매’로 상징되는 마한 남부연맹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들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복암리 1호분 피장자가 그러한 연맹을 대변하고 있었으리라고 하는 것을 ‘응준’ 녹유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독자적인 세력 형성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 마한을 ‘용맹하다’라고 기술한 것은 마한 남부 연맹체가 ‘응준’을 상징으로 하며 중국 중심의 질서에도 동참하지 않고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모습을 기술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렇게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며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주변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던 막강한 마한 남부연맹이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의 한 차례 공격으로 무너질 수가 없는 것이라 하겠다. 오히려 6세기 무렵까지도 백제와 치열하게 정립되는 구도를 형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대회전을 앞둔 백제로서는 마한 남부연맹 세력과 공존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복암리 1호분 세력에게 ‘응준’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녹유명문은 이때 주어진 선물이라 생각한다. 이것을 백제 국왕이 복암리 세력에게 사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영산강 유역의 ‘응준’ 세력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고, 대신 백제의 힘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데서 나온 것이라 여겨진다.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탑에 마한 남부연맹을 지칭하는 응준이 나오는 것은 당시 마한 남부연맹 계통의 정치 세력이 주도권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한 남부연맹은 부여계의 백제 왕실과 대등한 수준으로 통합을 이룬 후 치열한 권력 다툼을 통해 7세기에 들어 이미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음을 알려준다. 무왕의 익산 천도 움직임과 의자왕 대 처절한 정쟁은 이러한 상황을 후대에 알려주고 있다고 하겠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