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75) 전라도 정체성의 상징 ‘응준’(上)

복암리 1호분 출토 녹유 탁잔 /  6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나주 복암리 1호분에서 ‘응준’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녹유 탁잔이 출토되었다. 이는 나주 다시들을 중심으로 한 ‘응준’이라는 마한 남부연맹의 정치세력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복암리 1호분 출토 녹유 탁잔 /  6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나주 복암리 1호분에서 ‘응준’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녹유 탁잔이 출토되었다. 이는 나주 다시들을 중심으로 한 ‘응준’이라는 마한 남부연맹의 정치세력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아직도 사람들은 ‘마한’ 그러면 ‘소도’(蘇塗)를 먼저 떠올린다. 그것은 ‘소도’가 삼한 사회를 소개하는 사료로 오랫동안 교과서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소도’는 그곳으로 도피한 죄수를 관리가 체포하러 들어갈 수 없다고 중국 기록에 나와 있어 ‘신성 구역’이라고 알려져 있다. 마치 요즘의 교회, 사찰, 성당 등의 종교적 기능을 하는 곳으로 인식하여 제정일치 단계에서 제정분리 단계로 삼한 사회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우리 지역에서는 ‘마한 붐’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이른바 ‘마한 특별법’ 제정으로 국비 예산을 지원받아 지역발전의 동력을 삼으려는 기대감과 함께 마한을 통해 전라도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도’가 과연 전라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 합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지역 마한 인식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남부여와 응준

필자는 전라도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응준’(鷹隼)에 주목한 바 있다. 이 문제를 재론함으로써 독자 여러분의 생각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고려 후기 학자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백제 성왕 때 ‘남부여’와 함께 ‘응준’이라는 이름이 국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우선 응준이라는 명칭이 제왕운기에 ‘혹 남부여, 혹 응준’이라고 한 것을 보면, 남부여와 대등한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전주 우석대 조법종 교수는 응준이라는 명칭이 ‘매’를 뜻하기 때문에 신라를 닭을 뜻하는 ‘계림’, 고구려를 늑대를 뜻하는 ‘맥·예맥’이라 칭하듯이 백제는 매를 뜻하는 ‘응준’을 별호로 사용하면서 나온 것이라고 살폈다. 이러한 해석은 그럴듯하나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백제는 국왕들이 사슴 사냥을 즐겨 하였다는 기록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사슴을 주된 ‘희생’(犧牲)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부여에서 우연히 출토된 유명한 백제 금동대향로의 맨 위 봉우리에 있는 사슴을 사냥하는 모습 또한 이러한 사실의 구체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부여계를 대변하는 동물은 ‘매’가 아니라 ‘사슴’일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관련하여 매를 ‘신의 화신’ 또는 최초 ‘샤만의 조상’ 등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마한 지역에 유포되었다는 견해는 시사적이다. 우리 민족의 원류에 해당하는 예맥족의 새, 사슴에 대한 신앙이 지역으로 분화되어 갔는데, 부여·고구려 등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는 사슴과 관련된 언급이 빈출되고 있다. 백제가 사슴을 희생으로 삼고 ‘부여’ 명칭이 사슴을 나타내는 퉁구스어인 ‘buyu’와 같다는 점은 백제가 부여계통이 주류였다는 사실을 반영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반면 신라나 마한 남부연맹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진한·계림‒닭, 마한‒매 등 새와 관계있는 언급이 자주 나온다. ‘매’는 백제 계통이 아닌 마한 남부연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용맹함을 상징하는 ‘매’가 국호까지 ‘남부여’로 바꾸며 부여족 계승 의식을 강조하였던 백제의 상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매’가 백제의 별호라는 인식은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매’는 백제 아닌 또 다른 집단을 대변하는 상징동물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정치적 실체의 상징

응준의 실체를 밝혀줄 중요한 단서가 삼국유사의 황룡사 9층 목탑 건탑(建塔) 설화에 나와 있다. 이 탑은 백제의 유명한 건축가 아비지가 설계한 동양 최대의 목탑이었으나, 고려 무신 집권기 침입해온 몽고군의 방화로 소실되어 현재 주춧돌만 남아 있다. 이 탑은 불보사찰로 유명한 양산 통도사를 세우고 계율종을 열었던 자장대사가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세웠다고 한다. 자장의 꿈에 9층 탑을 세우면 이웃 아홉 나라를 진압할 수 있다고 신령이 게시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1층 일본, 2층 중화, 3층 오월, 4층 탁라, 5층 응유(鷹遊), 6층 말갈, 7층 난국‒거란(丹國) 8층 여적(女狄) 9층 예맥 등 당시 동아시아 모든 나라가 포함되어 있으나, 선덕여왕 당시 신라에 계속 위협을 가하던 고구려·백제의 이름이 없어 의아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9층 예맥이 고구려라고 하면 나머지 5층의 응유가 백제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 곧 응유가 응준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응준이 백제의 별칭이라는 인식을 7세기 전반 선덕여왕 때까지 신라인들은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신라인들은 ‘백제’나 ‘남부여’라는 국명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는 당시 백제 사회 내부에서 사슴을 상징으로 하며 ‘남부여’라고 국명을 바꾼 부여계통의 백제 왕실과 달리 ‘매’를 상징으로 하였던 또 다른 세력이 백제의 주류를 형성하였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곧 신라인이 언급한 응준은 사슴을 상징으로 하며 ‘남부여’로 국호를 고치었던 부여계통의 백제 왕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매’를 상징으로 생각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갔던 세력, 곧 마한 남부연맹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조법종 교수는 ‘응유’ 곧 ‘응준’은 부여계 유이민 세력을 대변하는 명칭과는 다른 계통이라고 살폈다. 그는 ‘응준’을 백제가 형성되기 이전의 정치체, 말하자면 삼한 사회의 문화적 특징으로 살펴 ‘伯濟’ ‘十濟’ ‘百濟’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한 부여 계통성과 구분하는 의미로 살폈다. 말하자면 ‘응준’은 백제가 구체적 존재로 등장하기 이전 또는 다른 지역 세력 명칭을 뜻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응준’을 부여 계통과는 다른 집단으로 파악한 것은 탁견이다. 다만 그가 응준을 백제 일부로 파악한 점은 마한 남부연맹의 상징이라 하여 백제를 상징하는 남부여와 대칭되는 것으로 살핀 저자와는 견해가 다르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 탑에 남부여라는 백제를 뜻하는 국명 대신에 ‘응준’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을 볼 때 ‘응준’ 명칭이 7세기 전반까지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응준’이 단순한 문화적 특징이 아닌 정치적 실체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7세기 전반 선덕여왕 당시 신라를 압박한 ‘응준’은 부여계통 세력이 아닌 마한 남부연맹 계통의 백제 세력이라고 살피는 것이 기록에 충실한 해석이 아닌가 한다. 6세기 중엽 무렵 것으로 여겨지는 복암리 1호분의 피장자의 녹유 탁잔에 ‘응준’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을 보면, 피장자가 세력을 형성하였던 다시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이 ‘응준’이라 부르는 마한 남부연맹의 거점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여겨진다.<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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