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가 되었다. 이제 80 나이도 금방 다가올 것 같다. 시간이 화살보다 빠르다는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 2년 가까이 계속되는 코로나19의 사태가 언제쯤 끝날까? 동창회와 친목 모임 등 각종 모임은 잊어버린 지 오래됐다. 그래서 더욱 보고 싶고 그리웠던 사람들을 못 만나 가끔 한숨만 저절로 날 때가 있다. 지긋지긋한 마스크는 언제까지 입마개로 덮고 답답하게 살아가야 하나? 아직도 TV만 켜면 하루 코로나 확진자가 수 백명씩 줄지 않고 발표된다. TV 뉴스도 지겨워진다. 이럴 때 혼자 있으면 과거에 많은생각들이 떠오른다. 특히 가난한 산골짜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이 자꾸 생각이 난다.
서호면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6.25전쟁 이후 학교 건물은 많이 부서져 있었다. 교실 안에는 책걸상이 없었다. 교실 바닥에 볏짚으로 만든 가마니를 깐 채 책상도 없이 바닥에서 공부했다. 어린이들의 영양보충을 위해 우유 가루를 큰 가마솥에 끓여서 한 사람씩 나누어 먹게 했다. 담임선생님은 회충약을 나누어준 뒤 항문에서 나온 지렁이 같은 기다란 회충을 두 마리씩 학교에 가져오도록 했다. 또 쥐잡기 운동에는 죽은 쥐꼬리를 잘라서 두 개 이상씩 가져오도록 했다. 수업 도중에 비행기 소리가 나면 수업을 중단하고 교실을 빠져 나와 방공호로 숨는 훈련도 자주 있었다. 60여 년이 지난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흑백영화 감상이 제일 재미있었다. 두터운 검은 천으로 교실 창문들을 모두 덮었다. 대낮인데도 교실 안은 밤처럼 깜깜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심청전’ ‘춘향전’ ‘홍길동전’ 재밌는 영화가 화면과 입 모양이 틀린 변사의 목소리지만 실제의 인물 목소리와 같아 재미있었다. 영화를 보다가 밖으로 나오면서 교실 유리창이 떨어져 얼굴에 맞아 큰 상처를 입고도 병원이 없어 된장으로 상처를 덮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지금도 그 흉터가 얼굴에 작게 남아있다. 초등학교까지 십리 길을 오가면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목화의 어린 순인 달래와 무 등을 뽑아 먹었다. 봄에는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속을 먹다가 주인에게 들켜 산림 훼손으로 종아리를 맞고 울었던 시절도 생각난다.
그만큼 당시에는 곡식이 부족해 굶주림에 허덕였다. 쌀밥과 고기는 추석과 설날 등 명절에나 먹을 수 있었다. 부자들은 보리밥을 먹었으나 가난한 우리들은 보리를 갈아서 만든 보리가루 죽을 먹었다. 가끔 보리개떡이 최고의 간식으로 먹는 경우가 있었다. 마을에 가끔 빵 장수가 나타나면 돈이 없어 부모 모르게 보리나 밀을 갖다 주고 빵을 몰래 먹었던 추억도 있었다. 초겨울이 되면 부모가 사다 준 겨울 내복을 입고 너무 기분이 좋아 내복만 입고 동네 한 바퀴를 뛰어다녔던 창피한 기억도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1학년 2학기 등록금이 없어 자퇴했다. 6·25전쟁 때 가신 아버지 생각으로 눈물만 한없이 흘렸다. 어쩔 수 없이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고등공민학교에서 공부했다. 필자는 그래서 중학교 졸업장이 없다.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를 합격했으나 돈이 없어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했다. 2년 동안 고향에서 농사 일을 하며 독학을 했다. 당시 친구들은 광주나 목포에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방학 때마다 고향에 왔을 때 너무 부러워 울기만 했다. 결국, 서울에 무작정 상경하여 야간 고등학교에 진학해 고학을 결심했다. 낮에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야간에는 학교에서 공부했다. 학교가 끝나면 신문사 편집국 사무실에 돌아와 밥을 해 먹고 책상 위에서 군용 담요를 덮고 잠을 잤다. 아침에는 사무실과 화장실 등을 청소하면 새로운 일과가 시작됐다. 학교에 가면 고3이 되어야 할 나이인데 고1이 되어 늙은 고교생이 된 셈이다.
고 2때 군 입대 신체검사 통지서가 왔다. 고 3때 대학에 떨어지면 영원히 대학을 가지 못하고 군대를 가야 했다. 고 3때 대학진학을 위해 노량진 산꼭대기 판잣집을 얻어 친구와 함께 자취하며 입시에 전념했다.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의자와 몸을 밧줄로 묶어놓고 밤을 세워가며 대학입시 공부에만 전력투구했다. 나는 스스로 자학을 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으로 대학에 합격하면 사형집행이 면제되고 새 삶을 살 수 있다는 신념으로 공부해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 졸업 때까지 4군데 그룹 과외선생으로 대학생 가장이 되었다. 결국, 가난 때문에 법과 대학생으로 사법고시의 꿈은 이루지 못했으나 대신 언론인으로 탈바꿈해 새 길을 걸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