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광주 K초에 첫 둥지를 틀었다. 기대와 희망 속에 부풀어 파라다이스일 것으로 생각했던 도시 모습은 재개발의 몸살로 여기저기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알맞은 전셋집 구하기는 힘들었다. 토끼 같은 자식이 넷이나 딸렸으니 선뜻 방을 내주지 않았다. 이 잡듯이 샅샅이 뒤지니 반기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마음씨 넉넉한 군 장교 집이었다. 열악한 전세방에서 1년을 버티니 학교 관사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야외 화장실이 조금 불편했지만 집 없는 처지에 어쩌랴.
광주의 첫 관문은 K교에서 3년 만에 통과했다. 당시에 수많은 변두리 학교 교사들의 관심은 도심 속의 3대교였다. 몇 년 만에 내가 3대교 중, J초에 뽑혀 전근했다. 당시 전입 부정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은행알 추첨을 했는데 첫 혜택을 받았다. 그렇지만 전세방 구하는 일에 또, 골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마음씨 고운 사람은 거기에도 있었다. 기차소리 요란한 상하방이었지만,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행운은 찾아 왔다. 주택공사에서 화정동에 건축한 16평 공무원 임대아파트를 분양받은 것이다. ‘시골 촌놈이 아파트라니 이런 복이 또, 어디에 있을까?’ 이곳 아파트는 수준이 엇비슷한 공무원들끼리 이웃하고 살아 위화감이 조성되지 않고 모두들 친구같이 다정하게 지냈다. 그렇게 집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던 세월이 훌쩍, 8년 임대만료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또다시 전셋집을 근근하려니 자식들은 커가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살아야할 집 생각을 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택공사에서 H지구에 택지를 분양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양권을 두 필지에 넣었으나 당첨되지 않았다. 점점 임대 만료일은 다가오고, 집도 절도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가고 있었다. 코가 쭉 빠져 삶의 의욕까지 상실되어 가던 때, H지구에 계약조건을 맞추지 못한 미분양 택지가 12필지 나타난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처음의 실수를 거울삼아 가장 열악한 곳에 분양권을 넣자.’ 아내와 머리를 싸매고 며칠을 궁리하고 또 궁리해서 최종적으로 묘안을 찾은 곳이 동네 한 가운데 필지였다. ‘선호도가 가장 낮으니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희망하지 않겠지.’ 그런 짐작을 했지만 우리만의 생각이 아니었을 듯, 결과는 무려 100명 되었으니...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토요일 오전부터 추첨을 했는데 속상한다고 아내는 가지 않은 것 같았다. 퇴근한 나에게 추첨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혹시 당첨되었을지도 모르니 추첨 장소를 한 번 가보자고 아내에게 말하니, “우리 복에 뭔 당첨이 되겠오.” 아내는 씁쓸한 말을 허공에 날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것이여!’
이슬비가 촉촉이 내려 마음이 쓸쓸하고 집 없이 쫓기는 신세가 처량하여 발걸음이 천근이었다. ‘당첨률이 100대 1이라니 하늘에 별 따기보다 더 어렵겠지?’ 1천 명을 방불케 하는 사람들이 모여 전쟁터 같은 치열한 추첨이 끝났는지 그 열기가 아직도 식지 않고 남은 듯했다. 당첨자 명단을 적은 캔트지가 사무실 바깥벽에 외롭게 붙어 있었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당첨자를 살펴보니 ‘이게 뭔가?’ 12명 당첨자 중에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우리가 선택한 지번이 일치하지 않는가, 눈을 의심하고 비비며 다시 확인해도 틀림없는 당첨이다. 기뻐서 정신이 흐려지고 기절할 것만 같았다. 사무실로 들어가 서류를 확인하니 당첨이란다. 추첨할 때, 당첨된 사람은 악을 쓰며 난리였는데 선생님 추첨 때만 반응이 없었다고 하며, 당첨을 축하해 주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하면서 급히 전화박스를 찾았다.
“여보! 당첨! 당첨! 우리에게도 집 지을 땅이 생겼어!” 공중전화기를 들고 길길이 뛰면서 외쳤다. “그게 정말이요. 장난치는 거 아니지요?” 아내가 금방 달려왔다. 서로 부둥켜안고 뛰면서 나라가 해방된 것처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 소원 성취했네! 우리 집이 생긴 것이네!” 아내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큰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초봄에 설계를 맡기고 건축자를 정했다. 건축가에게 맡겨 짓고 있었지만 퇴근 시간만 되면 일하는 사람들이 마실 맥주를 사들고 번질나게 다니면서 정성껏 잘 지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내도 매일 공사장에 가서 자재를 좋은 것으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봄에는 비가 잦아 조금만 날씨가 흐려도 작업을 하지 않아 공정기간이 늘어져 속을 태웠다.
몇 달의 산고 끝에 아름다운 25평 단층 양옥집이 눈앞에 선을 보였다. 난생처음 대문에 내 명패를 걸고 집주인이 되었다. 넓은 앞마당에 주차장이 들어서고 거실 앞 창밑에 멋진 양어장도 만들었다. 바닥은 콘크리트를 치고, 옆은 잘 다듬어진 고운 돌로 양어장 벽을 조립했다. 며칠 동안 양어장 안에 물을 담아 콘크리트 독을 우려냈다. 새 집을 찾아 온 붉은 비단잉어가 즐거워 멋진 춤을 뽐냈다. 주인의 발소리를 멀리서부터 알아듣는 귀여운 삽살개 ‘아롱이’도 한 식구가 되었다. 앞마당 화단 옆에 장독도 만들었다. 화단에서는 봉선화와 철쭉도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했다. 주차장에 긴 화분에서는 싱싱한 고추가 풍성하게 열렸고 대문 옆 좁은 공간에 대봉 감나무도 검푸른 잎에 금방이라도 홍시를 내놓을 기세였다. 넓은 거실과 방 세 칸은 우리 여섯 식구 살기에 아주 편안하고 안성맞춤이었다. 임대아파트의 좁은 공간에 살다보니 새로 이사 온 우리 집은 대궐 같았다. 거실이 넓으니 식구들은 조그마한 인형처럼 느껴졌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전세금을 받을 요량으로 2층에 방 4개를 만들어 두 집 살림을 할 수 있도록 2차 건축을 하게 되니, 2층 양옥집 주인이 된 것이다. 전셋집을 전전하다가 양옥집 주인이 되니 이 세상이 전부 내 것인 양 마음이 흡족했다.
집을 드나들면서 내 문패를 쳐다보며 위풍당당하기까지 했는데 IMF 진통은 우리 가정에도 몰아치기 시작했다. 단층은 대부를 받아 지었으나 2층은 전세금을 받아 지었기에 빚인 셈이다. 전입자들이 전세금을 내려 주라고 한다. 이사를 가겠단다. 더 이상 주인 행세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출이율도 높아가며 불안이 조성되기 시작하니 어렵게 장만한 보물 1호, 사랑의 보금자리를 처분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양옥집 주인은 한 바탕의 춘몽이었단 말인가?
나라가 위기에 처하니 부동산 매매도 되지 않고 지었을 때의 시세보다 낮아 갔다. 그래도 다른 뾰족한 수가 없으니 낮은 가격에라도 매매를 해야 했다. 몇 달을 여러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사랑방 신문에 게재를 했어도 가격조차 묻는 사람이 없었고, 사겠다고 몇 사람 들렸다 흠집만 잡고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모처럼 아내와 같이 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조그마한 동네 부동산이 눈에 띄어 “저기 한 번 들어가 볼까?” “그렇게 여러 군데 큰 부동산에 내 놓았는데도 팔리지 않았는데 저런 조그마한 부동산에서 우리 집을 팔아 주겠오. 당신도 참,” “뭔 소리여, 그것은 모르는 거여, 밑져 봐야 본전 아니어.”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가니 나이 듬직한 여자 분이었다. 우리말을 듣더니 아주 긍정적이고 사글사글하여 신뢰가 갔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집을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번 중개해 보겠습니다.” 문을 나서면서 말이라도 기분이 좋았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살 사람이 생겼다는 전화였다. 너무 반가웠다. ‘오늘 아침에 또 천사를 만났군.’ 집 살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 와서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흠집도 잡지 않았다. ‘그래, 살 마음이 분명히 있는 사람이군,’ “집안에서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습니다. 믿음도 있으신 것 같고요. 이 집에 사실 때 어떤 좋은 일이 있으셨어요?”
“좋은 일이야 많았지만, 내가 광주시교육청 장학사에 합격한 일이 가장 큰 경사였지요.” “집터가 아주 좋은 가 봐요. 제가 살게요.” 다른 때보다 더 높은 가격에 내놓았는데 깍지도 않고 두 말없이 계약이 성사되었다. 설마의 아침 발걸음이 구원병이 된 것이다. 그렇게 팔려고 발버둥을 쳐도 성사되지 않더니 하루아침에 쉽게도 매매가 성사되니 기쁘면서도 허전했다.
H지구에서 화정동 Y아파트로 이사를 해 10년을 살다가 길 하나 건너 도로변 상가로 또, 이사를 했다. 아래층에 상가 전세를 주고, 2층에 살림집을 꾸며 사는데 차량의 심한 소음과 매연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4년 만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현재의 살고 있는 사랑의 보금자리는 쌍촌동의 다세대 주택으로 아홉 가구가 함께 살고 있다. 불편함 없이 6년째 살고 있는데 도심 속인데도 차들이 달리는 도로와 떨어져 소음이 적고 양쪽으로 공원과 중학교들이 있어서 공기가 맑다. 이웃집도 최근에 이사 왔는데 집 주인이 깔끔해 집단속을 잘하여 우리 집이 돋보인다. 옥외 현광등도 설치해 대낮처럼 밝게 빛난다. 이웃이 맘에 든다. 아내 손을 잡고 고만고만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낯선 광주에서 전셋집과 임대아파트를 전전하여 여기까지 오며 고생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우리 삶의 보약이 아니었을까? 젊은 청춘을 불사르고 이제는 머리가 반백이 되고 얼굴에는 잔주름이 늘어만 간다. 앞산 중앙공원 어린 편백도 우리를 반기고 꾀꼬리 응원소리가 들린다. 초저녁 옥상에 올라 반짝이는 별을 세며 아내와 하루의 일상을 도란거리면 저기만치 상무의 찬란한 네온 빛은 우리 가정의 평화를 빌고, 운천호수 아름다운 연꽃이 환하게 미소 짓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