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56-역사 교과서에 나타난 마한사(상)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융합문화의 산물
지난 호에 영암지역 마한 대형고분을 주제로 왕인박사현창협회 주관 학술세미나가 있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이날 토괴(土塊: 흙덩이)를 활용한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축조 기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가야 및 신라, 일본과 교류가 백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세력 중심지의 이동 혹은 재편 과정에서 5세기 중엽 무렵에 영암 시종 일대 세력이 대외 교류를 통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는 주장이 있었다.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토괴를 이용한 축조 기술은 왜의 동심원 양식과 가야의 방사선 양식이 결합한 융합문화의 산물이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영산 지중해에 자리 잡은 마한은 중국, 왜, 가야 등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교류를 백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세력 중심지가 영산강 일대로 이동한 정치 세력이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살핀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에 밀리지 않은 상태의 영산강 유역의 마한 토착세력은 왜나 가야 등과 교류는 없었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이는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마한사의 중심이고, 그 문화의 발상지라는 점을 애써 무시하고 백제 중심의 마한사를 애써 주장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필자가 누차 이야기를 하지만 백제의 정치적 변동에 따라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을 이해하려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필자는 올해 수능시험을 치른 고교 3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마한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였다. 현재 고등학생들이 어떻게 마한사를 인식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그들에게 ‘백제의 마한’이 아닌 ‘마한의 백제’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이해하고, 나아가 영산강 유역이 마한의 중심지이자 마한문화의 발상지임을 알아야 함을 이야기하려 하였다.
잘못된 교과서 서술은 바로 잡아야
본란에서 다루었지만, 2020년부터 첫 적용된 2015 개정 교육과정 역시 마한사의 비중은 줄어들었고, 4세기 중반 백제의 영역에 전라도가 포함되었다는 주장 역시 변함이 없다. 이러한 교과서의 서술은 수학능력시험은 물론이고 공무원 시험에도 영향을 미치어 마한사 실체를 왜곡하는 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따라서 4세기 중반에 백제가 마한 전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교과서의 서술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4세기 중반에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는 이병도의 학설을 보다 체계적으로 비판하여야 함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시에 교과서 집필 과정에 기원전 2, 3세기부터 기원 후 6세기 중엽까지 약 800년간 마한이 한국 고대사의 서술이 올바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마한역사연구회는 마한사의 세계유산 등재와 더불어 교과서에 올바른 마한사가 서술되도록 역량을 기울이려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한사의 교과서 서술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시기별 교과서에 나타난 마한 관련 서술을 일별(一瞥)하고자 한다. 서술의 편의상 국정교과서 체제였던 1999년도 한국사 교과서와 첫 검인정 교과서 체제였던 2009 교육과정, 그리고 역시 검인정 교과서 체제로 올해 시작된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서술 등을 다루어 각 서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7차 교육과정(국정교과서 체제, 1999)
<삼한> 고조선 남쪽 지역에는 일찍부터 진이 성장하고 있었다. 진은 기원전 2세기경에 고조선의 방해로 중국과의 교통이 저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에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대거 남하해 오는 유이민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들이 나타났다.
마한은 천안⋅익산⋅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하였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10여만 호였다. 그 중에서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변한은 김해⋅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진한은 대구⋅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12개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4만~5만 호였다. 그 중에서 큰 나라는 4000~5000호, 작은 나라는 600∼700호였다.
삼한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을 이루고 있는 소국의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삼한의 지배자 중에서 세력이 큰 것은 신지, 작은 것은 읍차 등으로 불렸다.
한편,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 지역으로 소도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사장의 존재에서 고대 신앙의 변화와 제정의 분리를 엿볼 수 있다.
소국의 일반 사람들은 읍락에 살면서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을 담당하였으며, 초가지붕의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다. 또, 공동체적인 전통을 보여주는 두레 조직을 통하여 여러 가지 공동 작업을 하였다.
삼한에서는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과 가을 곡식을 거둬들이는 10월에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천 행사 때에는 온 나라 사람이 모여서 날마다 음식과 술을 마련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겼다.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사회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였고, 벼농사를 지었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왜 등에 수출하였다. 철은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철기시대 후기의 문화 발전은 삼한 사회의 변동을 가져왔다. 지금의 한강 유역에서는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마한 지역을 통합해 갔다. 또, 낙동강 유역에서는 구야국이, 그 동쪽에서는 사로국이 성장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각각 가야 연맹체와 신라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마한 목지국
마한 목지국은 처음에 성환⋅직산⋅천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백제의 성장과 지배 영역의 확대에 따라 남쪽으로 옮겨 익산 지역을 거쳐 마지막에 나주 부근(오늘날의 대안리, 덕산리, 신촌리, 복암리)에 자리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을 칭하던 국가 단계의 목지국이 언제 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안 지역에 근거를 둔 초기 마한은 4세기 후반, 그리고 나주의 마한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여, 마한의 바탕 위에서 성장한 백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영역을 잠식해 들어갔다
<삼국의 발전>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의 백제는 마한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상이 1999년 교과서의 서술이다. 비교적 삼한 부분이 상세히 언급되고 있는데 이때는 최몽룡 교수가 고대사 집필자로 들어가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이 서술의 특징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