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54- 보성강 유역의 마한(下)
전남의 대표적 구석기 문화유적지
보성강은 길이가 126.75㎞에 이른다. 보성군 웅치면 대산리 제암산 남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장흥군에서 장평천, 보성읍 북쪽에서 노동천과 합류하고 미력면과 겸백면에서 보성강 댐을 이룬다. 보성강 댐은 일제가 1930년 후반 일제가 득량만에 대규모 간척지를 조성하면서 필요한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필자의 고향 뒷산 대룡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어 득량만으로 흐르게 하였다. 조성면과 득량면, 고흥군 대서면의 대규모 간척평야에 필요한 농업용수는 이곳의 물을 이용한다. 이 낙차를 이용하여 발전용량 3천120kw의 수력발전소가 세워졌다. 이른바 유역변경식 발전소라고 하여 60대 이상의 독자들은 학창시절 공부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미력 용정리에서 보성읍에서 흘러내리는 보성천과 합류한 보성강은 북쪽으로 흘러 율어천·동복천과 합류하고 북동쪽으로 흘러 순천시 송광면에서 주암댐을 이룬다. 곡성군에 이르러 온수천·죽곡천과 합류한 뒤 죽곡면과 오곡면 경계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영산강이나 섬진강, 탐진강이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흐르는 데 반해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높은 산악지대를 굽이쳐 흐르며 곡성 압록에서 섬진강과 합류하고 있다.
이처럼 전남 중동부 지역의 내륙을 휘저으며 흐르는 보성강은 전남의 대표적인 구석기 문화의 유적이 대규모로 확인되고 있어 일찍부터 선사문화가 발달하였음을 알려준다. 보성강 유역에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묘제인 지석묘군이 광범위하게 펼쳐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마한시대에 들어와서도 보성강 유역을 중심으로 정치체들이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물론 보성강 유역은 험한 산악지대를 흐르는 보성강의 특성상 좁은 곡간을 형성하고 대규모 정치체의 존재를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복내와 미력을 아우르는 비리국이라는 마한왕국이 보성강 중상류 지역에 있었다. 비리국 이외에도 대룡산 넘어 득량 지중해를 내해로 하는 초리국이 득량만과 고흥반도의 정치세력을 아우르는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보성 지역에서는 모두 9곳에서 발굴조사가 행해졌다. 이들 대부분은 목포-광양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공사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보성지역의 발굴조사가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은 아니나, 이 지역에서 확인된 출토 유적·유물은 마한시대의 특성을 충분히 설명해주고 남는다.
비리국의 흔적을 확인시켜 주는 유적으로 겸백면 도안리 석평 유적과 미력면 용정리 활천 유적·덕림리 송림유적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도안리 석평 유적은 위에서 언급한 겸백 저수지 상류에 위치하여 있는데 해발 190m 정도의 야산에서 뻗어내린 구릉부에 입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대규모 생활유적과 생산유적이 확인되었는데, 원형계 집자리 52곳, 방형계 집자리 80곳이 확인되었다. 기원후 1세기 후반부터 4세기 무렵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마한 시기에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형은 주로 보성강 유역 집자리인 반면 방형은 영산강 유역 집자리이다. 원형 집자리에 방형의 집자리가 들어선 셈인데, 이를 통해 토착적 전통이 강한 보성강 유역에 영산강 유역의 문물이 유입되며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출토된 발형 토기, 옹형 토기, 장란형 토기, 호형 토기 등은 이 지역의 지역적 특성을 알려준다. 특히 보성강 유역의 지역적 특성을 보여준 타날문 토기와 공열 토기도 함께 나왔다. 이곳 석평 유적에서는 수정도 출토되었는데, 수정을 가공한 유구도 확인되어 마한인이 구슬을 중시하였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향’
바로 석평 유적과 가까운 곳에 있는 용정리 활천 유적은 분묘유적으로, 이곳에서 호형토기와 발형토기, 광구평저호, 양이부호, 철겸, 철부 등이 출토되었다. 3세기 후~4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유적은 보성강을 중심으로 길게 뻗어 저평한 구릉상 대지가 발달한 곳에 있다. 활천(活川)은 곧 내가 살아 있다는 뜻으로 ‘살래’라는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의 고향 이웃에 있는 살래는 어렸을 때 배를 타고 그곳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살래는 ‘사어향’이라는 지명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향’이 이곳에 있음을 알려준다. ‘향’은 부곡과 함께 군(郡) 단위의 행정구역으로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살래 지역에 향이 있었다는 것은 이 지역에 이미 마한시대에 커다란 정치체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살래 마을이 있는 뒷산에 백제식 성터가 있다는 것도 이러한 추정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활천과 석평 유적은 이곳이 보성강 상류지역의 평지에 있던 마한의 대국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이들 정치체는 보성강 중류 지역에 위치한 복내 지역의 정치체와 비리국이라는 마한의 대국을 형성하였다.
득량만에 위치한 금평 유적은 보성군 벌교읍 척령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원형 집자리 두 곳이 확인되었는데 심발, 소형장경호, 시루, 토제곡옥, 복골, 철부 등이 나왔다. 2세기~3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유적은 해발 300~500m 정도의 산지 사이에 형성된 곡간평지의 완만한 지역에 위치한다. 조사결과 청동기 시대 주거지 1기, 원삼국시대 주거지 2기, 수혈 2기, 구상유구 3기, 패총이 확인되었다. 이 주거지는 원형을 이루고 있다. 이곳 패총에서 타날문 토기를 비롯하여 석기, 철기, 골각기 등도 나왔다. 그런데 이들 출토된 유물을 통해 패총이 장기간에 형성되었다기보다 유물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형성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 패총에서는 해남 군곡리 패총처럼 상어·복어·감성돔의 어류, 굴·꼬막·피조개·재첩·비단 고둥 등 다양한 어족 자원이 발견되고 있어 풍부한 해양자원을 바탕으로 부국을 지향한 득량 지중해 대국 초리국의 경제기반을 보는 듯하다.
이곳 금평 유적과 가까운 조성리에 또 다른 생활유적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원형계 집자리 13곳, 방형계 집자리 28곳 등 대규모 세력이 거주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청동기 시대 주거지 2기, 삼국시대 주거지 41기, 수형 14기, 구상유구 2기가 조사되었고, 삼각형점토대토기, 경질무문토기, 호형토기, 발형토기, 완, 고배, 개배 등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장란형 토기와 옹형 토기도 많이 보인다.
조성리 유적과 이웃한 조성지구 문화마을에서도 방형과 장방형의 생활유적이 확인되었는데 완형토기, 장란형토기, 호형토기, 발형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4세기 중반~5세기 전반의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듯 득량만에 위치한 벌교·조성 지역은 득량 지중해를 감싸고 있는 고흥반도와 함께 커다란 정치체를 형성하고 있음을 비록 그리 많지 않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보성강 유역 및 득량만 유적에서 커다란 봉분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형상으로 좁은 곡간에 위치하여 정치체가 소규모인 것과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여러 작은 세력이 분립된 채 각기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