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의병사(23) - ■ 호남 의병의 선봉, ‘영암 의병’
남평 거성동 접전
기유(己酉 1909) 3월 8일. 대장 서리 강현수는 박봉주·박채홍과 함께 나주 월교리에서 유진하였다. 이날 밤에 세 의병부대를 남평 운삼동에서 집합하여 선동으로 옮기는데 정탐군이 와서 “왜적 15명이 몰래 운곡(雲谷)으로 들어갔다.”고 보고하므로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본진은 장암에 머물고, 박봉주·박채홍은 철천에 진을 치고, 박민홍은 선동에 주둔하니 네 진이 서로 4, 5마정 사이에 있었다. 정탐군이 와서 적이 출발해서 선동으로 들어갔다 하므로, 이내 군중에 영을 내리어 돌담 밑에 복병하게 하고 적을 유도하여 싸움을 건 결과 겨우 5명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남은 적은 영산포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가 이 소식을 듣고 와 모였기에 나는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적의 세력이 점점 치열하여 감히 포학을 부리니 그 세력을 막아낼 수 없은 즉, 여러 개의 진이 모두 모여 적을 유도해 끌어내어 서로 어울려 승부를 결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만약 숨고 도망하여 각자도생하려 한다면, 이 어찌 대장부가 나라 위해 충성을 바치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어찌 이웃 나라에 알릴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일변으로는 영산포에 보발을 보내어 적의 마음을 격동하고, 일변으로는 여러 진의 책임자에게 통고하였다. 그래서 북쪽의 전수용·이대국·오인수와 동쪽의 안규홍·김여회·유춘신이 일제히 와서 상의하였다. 이튿날 새벽 천기를 살피게 하니 5색의 무지개가 서쪽을 꿰뚫었다. 모사 권택이 점을 쳐 보니 점괘에 ‘두 호랑이가 다투어 싸우는데 서쪽들이 어떻게 변했는가!’ 하였기로, 즉시 군중에 영을 아래와 같이 내렸다. “한 부대는 동쪽 대치에 매복하여 능주의 적을 방어하고, 또 한 부대는 대항봉에 매복하여 광주·나주·남평 고을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서남 간 월임치에 매복하여 영암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덕룡산(德龍山) 상봉에 매복하고, 한 부대는 병암치(屛巖峙)에 매복하여 서로 응원하게 하라.”
8시경, 능주에 있는 적 20여 명이 동쪽에서 쳐들어오므로 우리 군사가 일제히 사격하여 적 15명을 죽였다. 10시경 광주·나주·남평에 있는 적 60명이 북쪽에서 들어와 싸움을 걸기로, 우리는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적의 장수인 경무사(警武師)와 졸병 수십 명을 죽였다. 그리고 영암에서 들어온 적 10여 명은 이미 서남 간에 매복한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했다.
이번 싸움에 적을 잡은 것이 70여 명에 달했고, 우리 군사도 약간 명이 죽었는데, 그 중 드러난 이는 박여홍(박민홍 아우)·박태환·박기춘으로, 여홍·태환은 박민홍의 좌·우익장이고, 기춘은 본진 총독이다.
능주 풍치(風峙) 접전
기유 3월 11일. 장흥 한담리에 유진하고, 장대(將臺)에 비켜 서쪽으로 천기를 바라보니 적병이 오전 10시경 올 것 같으므로 급히 군사를 재촉하여 풍치 바윗돌 사이에 잠복하게 하였다. 열두 고을 왜적 4백여 명이 팔방으로 포위하고 들어와 서로 어울려 격전을 벌여 왜병 백여 명을 죽였으나 나머지 군사가 물러나지 아니한다. 나는 드디어 징을 쳐서 군사를 8문의 하나인 두문(杜門) 방으로 끌어들였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동요가 나왔다.
“심남일은 용마(龍馬)를 타고 산 밖으로 뛰어나갔고, 강현수는 풍운 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갔다.”
보성 곰재(熊峙) 접전
4월 2일. 장흥 우산에 주둔하였다. 이때 능주 헌병 20여 명이 매달 다섯 차례씩 장흥을 통과하므로 그들의 지나갈 때를 맞춰서 내외 생사 문을 가설하되, 구성(九星)에 응하고 또 8문의 법을 택하였다. 그래서 선봉장 강현수는 일등병 20명을 거느리고 두문 방에 매복하고, 모사 염원숙은 날랜 군사 20명을 거느리고 생문 방에 매복하고, 후군장 노병우는 화포군 2명을 거느리고 휴문 방에서 북을 치기로 했다.
오후 2시경, 적병 15명이 북 울리는 소리를 듣고 곧장 충돌해 오니 각 방위의 복병이 한꺼번에 쏟아져 포를 터뜨려, 적 8명은 당장에 죽고 나머지는 도망해 달아났다. 그래서 대포 2자루와 기타 무기를 다 빼앗아 한담(寒潭)에 돌아와 술을 마련하여 북을 울리며 온 군사와 큰 잔치를 했다.
보성 천동(泉洞) 접전
5월 12일. 천동에 주둔하고, 보성 창의장 안규홍에게 통지해서 석호산에 집합하여 서로 병사를 의논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군장 안찬재와 통장 김도숙을 시켜 백 리 밖에 있는 군량을 운반해 오게 하고, 후군장 김성재와 호군장 강달주를 시켜 소를 잡아 군사를 먹이며 산상에 깃발을 휘날렸다. 보성의 왜적이 산상의 깃발을 바라보며 50명의 군대가 북을 울리며 싸움을 걸어오므로 여러 장수는 응낙하고 말을 달려나가 접전하여 5명의 적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석호산으로 진군하여 안규홍과 더불어 적을 무찌를 계획을 이야기하였다. 모사 염원수는 다음과 같은 시 1절을 읊었다.
“이번에는 무난히 싸워 이겼다, 우리 두 진 기세는 웅장도 하군. 저 왜놈 없앨 날이 머지않으니, 하늘이 나라 위해 명장을 냈네.”
이세창은 나와 말했다. “적은 군사가 많은 군사를 당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남·북도 의병이 합세한 연후라야 대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좌우에서 모두 그 말을 옳게 여겨 즉시 여러 의진에 통문을 띄워 연합할 계획을 했는데, 이때 본의 아닌 조서가 한 번 내려 만사는 다 틀리고 말았다. 이 무슨 운명이냐. 하늘을 우러러 통곡한다. 나는 장차 어디로 가리오.
이상 ‘심남일실기’에 있는 전투 일지이다. 여기에 있는 전투상황은 일본 측 자료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전과가 약간 과장되어 있을 개연성도 있다. 그렇더라도 전혀 없는 사실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법하다. 부대의 전투상황 등을 기록한 ‘서기’가 부대 편제에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 측 기록이 의병의 피해 상황은 실제보다 부풀리고 일본군 피해는 거의 축소하거나 누락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볼 때, 양 측 기록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심남일실기’ ‘남호찬록’ ‘폭도사’ 등은 심남일 의병부대가 일제와 치열하게 교전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심남일의 ‘호남의소’의 경우, 1908년 3월부터 1909년 10월 9일 체포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26회나 헌병대나 수비대,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 순서를 보면, 강진-장흥-나주-화순-나주-보성-영암-장흥 유치 한대동-장흥 유치 신풍-함평 용진산-함평 석문산-해남 성내-화순 능주-나주 다시-보성 복내-나주 남평-화순 능주-보성 웅치-함평 천동-장흥 장서-영암 금마 등 전남 중·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전라도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이들의 활동지역은 주로 나주·함평·능주·강진·영암·장흥·해남 등이다. 이렇게 심남일 부대가 전남의 중·남부를 휘젓고 다녀도 일본군은 추격에 급급할 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전남 각 지역의 의병부대와 일본군의 교전을 살펴보면 그 대체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전해산 의병부대, 안규홍 의병부대와 더불어 1908~1909년 사이에 일제가 ‘거괴’(巨魁)라고 평가할 정도로 호남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의병부대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일본 정규군과 전투를 하면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 요격이나 야간 기습 공격 같은 유격 전술을 적절하게 구사하였다. “심남일은 용마를 타고 산 밖으로 뛰어나갔고, 강현수는 풍운 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갔다.”라는 동요가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심남일은 각 의병부대의 독자적인 활동보다 연합작전을 중시하였다. 이를테면, 5월 12일 천동에 주둔하고 보성 창의장 안규홍에게 통지해서 석호산에 집합하여 서로 병사를 의논하게 되었다라 하여 1908년 봄 안규홍이 의병을 조직하자 합진을 요청하였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전해산과도 그러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실제로 1908년 8월 이후에는 심남일은 안규홍·전해산·조경환 의병부대 등과 수시로 연합하며 의병 전쟁을 수행하였다.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