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연못에 밥풀을 던지면 고기떼들이 모여들어 밥풀을 잽싸게 낚아채가는 모습을 가끔 보아왔다.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고기떼처럼 우리 옛 조상들도 먹이를 구하기 위해 영산강 유역으로 모여들었다. 사냥감을 쫓아 다녔던 고된 수렵 생활에서 강가의 수산자원을 발견한 것은 일대 변혁이었다고 볼수 있다. 온화한 기후·도도히 흐르는 영산강 그 영산강 물속에서 뛰노는 고기떼들. 더더욱 강변의 조개떼까지...깊은 산속을 헤매며 사슴·토끼를 쫓아 다녔던 고된 생활에 비하면 훨씬 손쉽게 먹잇감을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우리 조상들은 체감하였을 것이다.
밥풀을 던지면 모여든 고기떼처럼 아득한 옛날의 우리 조상들도 어족자원이 풍부한 영산강 유역으로 모여 살게 된 것이다.(일례로 장천리 선사유적지, 영암읍 회의촌 고인돌 군락지 등)
영산강 유역의 구릉지대(언덕받이)를 찾아 집을 짓고 살면서 조개도 잡고 고기도 잡았다. 처음에는 나홀로 고기를 잡았으나 점차로 구릉지대의 집성촌 사람들이 공동으로 함께 어로작업을 하는 것이 효율적임을 깨닫고 공동작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같이 잡고 똑같이 나누어 먹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고기잡이 도구가 발달하자 잡은 고기를 나누어 먹고 남은 수산물이 생기게 되었다. 이 잉여수산물은 잘 관리하지 않으면 썩어서 버려야 했다. 갈수록 잉여 수산물이 많게 되자 말리거나, 절이거나 하여 내지 사람들에게 팔아 넘겨야 했다. 이렇게 잉여 수산물을 관리하는 일이 절박하게 되자 재치있게 관리할수 있는 사람을 뽑아 잉여 수산물 관리를 전담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선정된 잉여 수산물 관리자는 말리거나 절여서 내지 사람들에게 팔아 부(富)를 창출하였다. 창출된 부(富)는 공동체 자산으로 축적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잉여 수산물 관리자들은 공동자산으로 축적한 부(富)를 사유화하게 되었다. 곧 잉여 수산물 관리자는 집성촌 공동의 자산을 사유화하므로써 부를 독점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부에는 권력이 따른다. 부와 권력을 독점한 잉여 수산물의 관리자는 집성촌을 지배하였다.
영산강 유역의 50여 개 집성촌을 우리들은 마한의 부족국가라고 일컫는다. 이 집성촌의 지배자들은 계층사회를 조성하고 지배자로서의 권력을 과시하였다. 이들 지배자, 곧 부족장의 묘는 웅대하여 사후에도 집성촌 사람들에게 부족장의 위엄을 과시하였다. 신석기시대부터 점진적으로 변천 발전하였던 부족장들의 무덤은 고인돌에서 옹관묘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영산강 유역의 구릉지대에는 고인돌과 웅관묘들이 산재해 있고 그 부장물은 당시 부족장들의 화려한 장식문화를 엿보게 한다.
서호면 장천리의 선사 유적지에 있는 고인돌군은 널리 알려져 잘 보존되어 있지만, 영암에서는 그 규모가 가장 컸던 영암읍 회의촌의 고인돌군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유물·유적지가 널리 알려지고 문화유산으로 보존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고장 출신들의 의미 있는 사실 부각 여하에 좌우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근대 영암읍과 목포간의 도로개설로 파손된 채 딩굴고 있는 회의촌의 고인돌군을 볼때마다 주민으로서의 수치심을 느낀다. 그렇게도 회의촌에는 사람이 없었더냐? 가슴이 아프고 또 아프다. 하루속히 옛날처럼 복원하여 문화유산으로서 소중하게 보존되기를 갈구한다.
어떻든 장천의 고인돌군이나 회의촌의 고인돌군은 영산강 유역의 구릉지대에 형성되었던 집성촌 지배자들의 무덤임에 틀림 없다. 시종의 영산강유역 구릉지대에 산재한 옹관묘는 아직 미 개발 지역이라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지만 건설공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삼호읍 용앙리의 종원아파트 주변 일대에 산재했던 옹관묘는 거의 모두 발굴 파손되어 그 흔적이 없어졌다. 이 또한 모두 영산강 유역에 산재하였던 부족장들의 무덤이었던 것을...그 흔적이 없어졌다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흔적이 없어진 듯 어쩐지 아쉽다.
서해바다를 사이에 두고 중국과 영산강 유역을 끊임없이 드나들었던 황포 돗대의 배들. 이 소형 목선들은 중국의 높은 황하문명을 싣고 상대포에 기착하였다. 당시 상대포는 이들 배들이 드나들던 거점 항구였었다. 이 상대포에 인접한 성기동의 집성촌 사람들은 한반도 어느 곳보다 앞서 대륙문화를 전수받고 이곳의 전통문화에 동화시켜서 성기동 문화권을 조성하고 발전시켰었다. 찬란하게 고대 성기동 문화가 꽃피었던 것이다. 이 찬란한 성기동 문화권에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이윽고 1,600여년전에는 오경박사 왕인이 출현하였다. 뒷날 도선국사, 최지몽, 수미대사 등 많은 인재들이 이 성기동 문화권에서 배출되었다. 공식적으로는 405년에 왕인은 논어와 천자문, 와공, 야공 등 백제의 문화를 가득 싣고 빈약한 목선으로 상대포 항구에서 일본으로 출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이 2020년이니까 1600여년전의 일이다. 까마득한 옛 일이다. 어찌 그 옛일을 이 잡듯이 말 할수야 있겠는가. 오랜 옛 역사 이야기다.
역사란 인간행위의 집적으로서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로 보고 살며 미래를 전망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왕인박사가 도일하기 이전에 일본에는 죠몬시대, 야요이시대, 고분시대를 거쳐 아스카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왕인은 미개한 일본의 아스카문화를 발전시켜 일본을 개화하였다. 우리나라의 국시인 ‘홍익인간’ 곧 인류공영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시킨 분이라고도 말 할수 있다. 우리 영암, 성기동 문화권이 낳은 이 위대한 성현의 업적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괴테는 그의 저서 파우스트에서 ‘진리’란 말이 아니고 논리도 아니며 사실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요즈음 사람들은 ‘진리란 팩트이다’라고 곧잘 말한다. ‘진리란 사실’이란 말과 같은 말이다. 팩트가 사실이니까. 까마득한 옛날 왕인의 자취 추적에 내가 겪은 팩트를 말하고 본 주제를 끝맺으려고 한다.
<첫번째 팩트>1941년~1945년 내가 중학교 재학중에 모교의 후원 회장이셨던 박찬일 변호사가 자기 고향이 구림이라면서 여러분이 일본사(日本史)에서 배운 저 유명한 왕인도 구림이 고향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두번째 팩트>1944년~1945년 내가 중학교 3학년때 시간 강사로 취임했던 목포 본원사(本願寺) 주지 아오기(青木) 선생(일본규슈제국대학 사학과 졸업)으로부터 ‘왕인의 고향이 구림이었다는 구전(口傳)을 듣고 확인하기 위해 구림의 촌로들을 찾아서 탐문하러 다니고 있다는 말을 수차 들은 적이 있다.
<세번째 팩트>1943년~1945년 구림초등학교에서 재직하고 계셨던 박기수(광주사범학교 1회 졸업) 외숙을 찾아뵈러 갔더니 일요일인데도 6학년 진학반 아이들 5명 가량을 지도하고 계셨다. (그 중에는 훗날의 조희종 검사, 최재율 교수도 있었다) 이때, 직원실 현관문과 천장 사이의 공간(가로2m, 세로50㎝ 정도)의 기다란 벽지에 “구림은 왕인의 탄생지로 구다라(百淯)의 문화를 일본에 전하여 일본의 고대 아스카문화를 발전시키는데 공헌하였다”는 요지의 붓글씨를 읽은 적이 있다. 이제까지 내가 듣고 보고 탐구한 소견으로는 아득한 옛 신석기시대부터 영산강 구릉지대에 집거하엿던 성기동 집성촌은 그 규모가 컸으며, 문전의 상대포 포구를 거점삼아 중국의 대륙문화를 실어 나르던 황포돛대의 목선 덕분으로 한반도에서는 가장 먼저 황하문명을 전수받고 지역의 전통문화에 잘 동화시켜서 특유의 ‘성기동 문화권’을 조성 발전시켰다. 이렇게 조성된 성기동 문화권은 인접한 50여 부족들의 문화를 선도하였으며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토록 찬란했던 성기동 문화권에서 오경박사 왕인이 탄생한 것은 당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1556년 조선 명종 때 발족한 구림대동계의 영향으로 영암 문화권의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는 구림의 서호정도 아득한 옛날부터 면면히 흘러 내려온 성기동 문화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왕인은 성기동 문화권의 산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