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의병사(21)
■ 호남 의병의 선봉, ‘영암 의병’

영암지역은 이미 박평남·박민홍 등을 중심으로 ‘호남창의소’라는 강력한 의병부대가 결성되어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인 국사봉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국사봉이 지닌 전략적인 위치도 높이 평가되었을 것이다. 국사봉은 영암을 중심으로 남평, 능주, 보성, 강진, 장흥, 해남으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천연의 요새로 이루어져 장기전을 꾀하기에도 유리한 곳이었다. 따라서 심남일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영암으로 들어와 새로운 의병부대를 결성했을 법하다. 심남일이 (음)2월 13일 함평에서 남평으로 진군하였을 때, 영암 의병들과 합진을 충분히 논의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근거의 하나는 심남일 의병부대를 구성하는 초기 인물들이 영암출신이 많다는 점이다. 이때 ‘심남일 실기’에 있는 의병 조직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표 1>
이것은 ‘심남일 실기’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심남일 의병부대가 결성되었을 초기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병이 활발해지면서 조직이 개편되고 있음을 다음에서 알 수 있다.<표 2>
이처럼 심남일 의병부대의 결성 초기 구성원과 개편이후 구성원들을 비교하면 약간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즉, 심남일 의병부대가 결성될 초기에는 영암출신이 많고, 조직이 확장되며 개편되었을 때 보성출신 등 다른 지역 출신들도 포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남일 의병부대가 보성지역에서 안규홍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처럼 초기와 후기의 의병부대의 성격이 차이가 나는 것은 심남일 의병부대가 영암에서 처음 결성됨을 말해준다. 박평남 의병부대에서 선봉장을 지낸 노병우, 호군장으로 활약한 정관오 등도 심남일 의병부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심남일 의병부대에 박평남 영암 의병의 주력 일부가 합류하였음을 말해준다. 곧 심남일 의병부대와 기존 영암의 의병부대가 연합의병부대를 결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이 결성된 의병부대 명칭이 ‘湖南義所’라고 하는 데서 짐작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암에는 박평남·박민홍 등 의병장들이 영암출신 의병을 중심으로 조직한 ‘호남창의소’가 있다.
심남일은 이 의병부대를 그대로 인정하였을 법하다. 심남일이 부대를 편성할 때 ‘호남창의소’와 비슷한 ‘호남의소’라는 명칭을 사용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심남일이 ‘호남의소’를 사용한 것을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를 계승한 것이라고 홍영기 교수는 살폈지만,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선 심남일이 이제껏 이해하였던 것과는 달리 ‘호남창의회맹소’의 계승에 대해 깊은 애착을 느꼈다고 볼 근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현지 의병부대의 협조를 간절히 바라는 심남일의 입장에서 영암 의병의 상징인 ‘호남창의소’를 계승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스럽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호남의소’ 명칭이 나왔다고 본다. 영암지역에 기존 영암 의병과 함평에서 진군해온 심남일 의병이 결합한 남도 최대의 의병부대 ‘湖南義所’가 탄생한 것이다.
‘호남의소’를 결성한 심남일 의병은 박평남·박민홍 등 영암 의병과 때에 따라 합진(合陣)과 분진(分陳)을 자유롭게 하며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박민홍 또한, 심남일 부대에 편성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일본군 진중일지를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심남일 부대를 구성하는 주요 의병장들도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박민홍·박사화 의병부대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때로는 심남일 의병의 직할부대인 강무경과 함께 전투를 하고 있다. 이를 통해 분진 형태로 있다가 유사시에는 합진을 하는 그러한 체계로 부대를 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영암출신 의병장과 의병들은 심남일 부대의 구성원을 이루면서도 독자적인 부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특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은 영암 의병이 지닌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심남일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전투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주요 상황은 그가 작성한 ‘심남일 실기’의 접전일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번거롭지만 당시 전투 상황일지이기 때문에 그대로 전재하여 살피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겠다.<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