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한역사문화 보존과 발전방안 세미나

■마한문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방안
                                                                                      

이 배 용 
                       
전 이화여대 총장
전 문화재청 세계유산
분과위원장

지난 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세계유산총회에서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유네스코 유형문화유산이 14개, 무형문화유산이 20개, 기록유산이 16개 등재된 것이다.

유네스코(UNESCO)는 교육, 과학, 문화를 다루는 유엔 산하 기구이다. 유네스코는 인류의 유산이 오랜 시간의 흐름과 변화하는 사회, 경제적 상황 등으로 훼손되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인류의 문화 및 자연 유산 중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있는 유산에 대해 세계가 공동으로 함께 평가하고 확인하여 이를 함께 보호하고자 “세계유산협약”을 1972년에 채택하였으며 협약의 이행을 위해 세계유산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지침을 마련하였다.

한국의 마한문화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우선 세계 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해야 한다. 그 후에 협약과 운영지침에서 요구하는 “OUV”의 구비와 입증이 필요하다. 이러한 입증에 필요한 조건들로는 세계유산 등재기준, 진정성 및 완전성, 보호 및 관리계획 등이 충족되어야 한다.

마한문화가 꽃피고 이어져 내려온 스토리를 흥미롭고 유익하게 구성하여 세계화시켜야 한다. 마한문화를 인류 보편적 가치로 살려내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데 다양한 논리와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해양문화와 일본 신도 해신제

세키네 히데유키
  (関根英行)

가천대 교수


해신의 모체는 고대 일본을 구성하는 여러 외래문화 중에서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에 기원을 둔 ‘도작어로민(稻作漁撈民)’의 문화로 추정된다.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4~5세기에 멸망해 사방으로 흩어진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들의 문화로 추정된다. 그들은 해인으로서 어로와 항해를 영위하면서 집단으로 공동 해신을 섬겼다. 그리고 왜왕권이 일본을 장악하면서 그 정치 체제 속에 편입되었다.

왜왕권에서 한일관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북부 규슈에 거점으로 두었던 해인 씨족들의 ‘민속’ 차원의 해신은 국가적 차원의 제신(祭神)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어떤 해인 씨족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기도 하고 어떤 씨족은 왜왕권의 거처인 야마토[大和]로 옮기기도 했다.

또 어떤 씨족은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크게 발전하기도 했다. 율령국가는 정치사상으로서의 일본신화를 편집할 때 해신 씨족들의 해신도 황실과 혈연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편입시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신화의 신을 바탕으로 무사나 민간에 신사 신도가 정착되었다.

이러한 일본 해신의 존재 양식은 동아시아 해양문화의 변용으로 파악할 수 있다. 기원전 4∼5세기에 사방으로 이동했던 도작어로민족이 중국, 동남아시아, 한반도, 일본열도 각지에서 전개된 변천과정을 추적하고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연구과제이자 문화활동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지목되는 것은 이 글에서 살펴보았던 해신 모두가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의 근거로 삼았던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과 연광성이 있다는 점이다. 신공황후의 실재는 역사학적으로는 부정된 사실이지만 민간신앙으로 무비판적으로 존속되어 있다는 현실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가 과제로 남는다.

 

■‘영산강유역 마한 문화권 연구의 미래’에 대해

최 경 국

명지대 교수

 

저는 원래 일본의 에도시대 문학이 전공이기 때문에 고대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그래도 오늘 코멘테이터로 참석하게 된 것은 2019년 10월에 열린 <마한촌 건설과 해신제> 세미나에서 발표를 했던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권오영 교수님의 발표, “영산강유역 마한 문화권 연구의 미래를 위하여”에 대해 초보자로서의 코멘트밖에 하지 못하게 됨을 먼저 양해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원고를 읽고 매우 공부가 되었습니다.

질문을 하나 드리자면, “고분의 규모는 국력의 반영이 아니라 장제와 묘제의 반영임. 집권국가의 왕릉이 작아지는 현상 이해하여야 함”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작아지면 작아지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불교의 유입과 관계가 있지는 않은지요?

또 발표문에서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해상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입니다. 동남아시아산 소다 유리의 다량 유입: 부남-동오(서진, 동진)-마한 이라고 쓰여있는데 오늘의 발표시간이 제한되었기 때문인지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이 적습니다. 교수님은 논문 <백제고분 출토 유리구슬의 화학조성을 통해 본 수입과 유통>(고고학, 2017년)으로 유리구슬에 대한 연구도 있으시고, 2015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서 '구슬의 유통에 나타난 동아시아의 교섭'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도 개최하였는데 여기서 교수님께서 토론의 좌장을 맡으시기도 하셨습니다.

마한 문화권에서 출토되는 유리구슬이 당시 유력자에게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또 해상 실크로드의 관점에서 마한 문화권이 지닌 위치는 어떠한 것이었는지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대외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을 들 수 있는데 왜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면 되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항해술은 어땠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 시대는 목적지를 확인하면서 가는 산을 바라보고 가는 항해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7세기 견당사의 바닷길을 보면 남해를 경유하여 서해안을 따라 올라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다로 나가면 위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먼길을 돌아갔었는데, 그 이전 시대는 더욱 육지를 보고 가는 것이 안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랬을 경우 마한, 백제가 일본과 교류하는 데 적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동아시아 해양문화와 일본 신도의 해신제’에 대해

오 동 선

연구사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이 글은 일본 민간신앙 중 신도에서 이루어지는 해신제의 기원을 범 동아시아의 해양문화가 흡수된 결과로 보면서 시공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거쳐왔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5세기대 한일관계가 밀접해지고 항로의 발달로 지리상 한국에 더 근접한 오키노시마가 중요 기항지가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무나카타 씨족이 성장했다는 설명은 고대 한·일 관계에서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선사와 고대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고고학 조사로 확보한 자료가 아닌 민간신앙으로 추적해가는 과정은 토론자 입장에서 매우 신선하고 흥미로웠습니다. 몇 가지 궁금한 사항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키노시마에는 대규모 적석묘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키노시마의 고고학 자료는 시간 폭이 어떻게 되고 어떤 유구들이 있는지 대략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발표자의 견해에 따르면 중국 춘추전국시대 절강성 일대 도작어로민(오, 월, 동남아 해안지역 등)의 이주로 BC 4세기 경부터 북규슈 지역에 해신제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5세기대 새롭게 부상한 무나카타 씨족도 동일한 원류를 갖는 해인 집단의 일종으로 해석하면 되는 것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일본서기나 이후 역사서에 출자가 해인 집단일 것으로 추정되는 주요 인물을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대 한・일 관계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 이와이의 난(磐井の亂)인데, 혹시 이와이(磐井)의 출자가 해인 집단일 가능성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의 부안 죽막동으로 대표되는 해양제사 관련 유물과 현재까지 전해지는 해신제에서 중국 남부나 동남아 해양문화의 속성은 어떤 것이 있는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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