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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목리를 중심으로 독자적 정치체가 형성돼 있었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47> 담양의 마한 유적(下)

필자가 전라남도의 용역으로 파악한 지역별 비지정 문화재 현황을 보면 담양지역이 전남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많다. 담양지역이 이렇게 많은 것은 가사문화권의 중심지라 하여 조선시대 문화유산이 많은 까닭이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마한 이래로, 영산강 상류 지역에 위치하여 독자적 세력기반을 형성한 담양지역의 역사적 위치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문헌에서 담양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하는 시기는 백제 시대부터이다. 추자혜군, 율지현, 굴지현 등의 군현들이 담양군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추자혜현은 담양읍 무정면 일대, 율지현은 금성면 일대, 굴지현은 창평면·고서면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아직 담양지역의 마한 54국에 속하는 왕국의 이름은 특정되지 않고 있으나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영산강 상류의 기름진 평야라는 지리적 위치와 현재 확인되고 있는 고고학적 유적·유물을 통해 적어도 독자적 정치체가 성립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단연 주목된 것이 지난 호에 언급한 태목리 유적이다.

영산강 상류의 대표적 수혈주거지

태목리 유적이 위치한 담양군 대전면 일원은 기원후 3, 4세기 무렵 취락과 5, 6세기 무렵 고분 자료가 여러 차례의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밀집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혈주거지 435기를 비롯하여 토기 요지 1기, 분묘 12기, 용도 미상의 수혈유구 50기, 환호시설 등이 조사되어 하나의 취락단위가 복합적으로 조사되었다. 태목리 유적은 영산강 상류지역에서 조사된 마한시기 취락으로, 그 규모가 단일유적으로서는 가장 많은 수의 수혈주거지가 확인되고 있다.

태목리 유적 가운데 주거지 형태는 원형(11기), 말각방형(42기), 말각장방형(9기), 방형계(165기), 장방형(119기), 방형계(302기) 등 다양한 유형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여러 유형이 한 주거지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 지역이 아주 이른 시기부터 많은 사람이 집단을 이루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들 주거 형태를 통해 이 지역의 발전 단계를 4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주거 유적은 담양의 발전단계 보여줘

1기는 2세기 중엽∽말에 해당하며, 평면 형태는 원형과 말각방형이며, 노시설의 경우 무시설식과 부뚜막식이 확인된다. 기둥시설은 무주식과 벽주식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시기 출토유물은 경질무문토기가 주를 이루며, 타날문 토기도 조금 확인되고 있다.

2기는 타날문 토기 단계로 전환되는 3세기 무렵 해당한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방형과 방형이 주를 이룬다. 내부시설에서 기둥시설은 무주식과 벽주식이 유행하며 사주식의 요소가 등장하면서 벽주식과 사주식의 주거지도 일부 확인된다.

3기는 태목리의 성행기로, 4세기 무렵에 해당한다. 유물은 타날문 토기가 주로 확인되나 기형적인 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방형 위주에서 장방형의 비중이 높아지는 시기이다. 또한, 원형과 말각형태의 주거지가 점차 사라진다. 내부시설은 기둥시설의 경우 무주식과 벽주식이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나 점차 사주식의 수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4기는 태목리의 쇠퇴기로 5세기 전반에 해당한다. 출토유물에서 특히 외부에서 유입된 유공광구소호가 확인되며 토기가 백제양식과 유사한 형태로 변화됨을 알 수 있다. 주거의 평면 형태는 대부분 방형이며 장방형은 5세기 전반을 시점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출입시설은 돌출부가 사라지고 벽 중앙에 주공 한 개만 확인되는 형태로 변화한다. 내부시설은 기둥시설의 경우 벽주식보다는 사주식과 무주식이 높게 나타나면 사주식의 경우 벽주의 흔적이 거의 사라지고 전형적인 사주식으로 변화하는 양상이 확인된다.

영산강 상류로 확산된 마한문화

그런데 전형적인 영산강식 토기인 유공광구소호가 이곳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은 이 지역이 같은 마한 문화권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하지만 태목리에 백제 양식과 유사한 토기가 나타난 것을 가지고 백제 세력이 이 지역에 밀려 내려온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하다 하겠다. 담양지역은 남원과 연결되는 내륙 교통로 상에 있다. 남원은 마한, 백제, 가야의 세 문화권이 중첩되는 일종의 점이지대이다. 따라서 남원지역을 통해 담양지역으로 백제문화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곧 문화교류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머뭇거림이 있다. 즉 영산강 상류 가야토기의 특성은 영산강 하류에서 상류로 옮겨가는 것을 보여준다. 곧 영산 지중해를 통해 유입된 가야문화가 내륙으로 전파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담양지역에 보이는 백제계 양식의 등장은 남원의 내륙보다는 영산강을 통해 유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한다.

한편 고분 유적에서는 주구 87기를 비롯하여 영산강 유역의 전형적인 묘제인 토광묘 24기와 옹관묘 10기가 확인되었다. 이들 분묘 유구는 유적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 구간에서는 주거군과 중복을 이루며 중복관계를 통해 주거군이 먼저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며, 주거지가 폐기되면서 분묘가 축조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고분은 대부분 분구가 삭평되어 주구만이 남아 있는 상태로 평면 형태상 제형의 형태를 보이고 일부 방형이 확인된다. 매장시설은 토광묘가 중심이며, 대상부나 주구부에 토광묘 또는 옹관묘가 추가되는 양상이 대부분이다. 이들 고분에서 철모, 철겸, 옹형토기, 발형 토기 등이 나왔다.

또 다른 생활유적과 분묘유적이 확인된 창평면 유천리의 오산 유적에서 많은 토기가 출토되어 당시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주구 내부에서 호형 토기, 석실 바닥 석에서 유공광구소호, 고배, 개배가 출토되었는데 이들 토기들은 영산강 유역의 마한의 중심부에서 확인되는 유물과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오산 유적은 유물이나 주거지를 통해 편년을 대략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로 삼고 있는데, 태목리 유적은 2세기에 5세기로 편년을 추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태목리 유적을 형성한 집단이 오산 지역보다 일찍 이곳에 뿌리를 내렸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산 지역보다 토착성이 강고하게 형성되어 새로운 문물 유입에 소극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보다 늦게 형성된 오산 지역은 영산강 유역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문화 유입에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은 태목리 유적에서 확인되는 영산강식 토기의 규모가 오산 유적에 미치지 못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것만 보더라도 영산 지중해를 통해 형성된 마한문화가 차츰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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