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갑 홍 영암학 회원 영암군 문화관광발전협의회 회장 관광경영학 박사

오늘은 장마철이라 그런지 별나게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손수건은 들었지만 흐르는 땀을 주체 못하면서 마당바우 마을 앞을 지난다. 위풍도 당당히 정면 4칸에 측면 3칸 팔작지붕을 하고 서 있는 장암정 앞에 도착하였다. 먼저 온 회원들과 한참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문중 어르신들도 나오셔서 환영해 주신다. 그 중에 90의 연세가 넘으신 문장 어르신이 반듯한 모습으로 시원한 삼베옷을 입으시고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나오시는데 존경 그 자체였다. 우리는 우르르 가서 바쁘게 인사를 드리고 나니 총무란 분이 어르신 한분 한분을 소개해 주셨다.

‘마당바우’라는 마을은 1455년에 터를 잡고 조선 현종 8년에 장암 대동계를 창계하여 계원 간 친목을 도모하고 애경사의 부조 내용을 잘 정리한 ‘용하기’를 보존하고 계셨다. 마을 어르신들을 따라 남평문씨 문각을 둘러보고 종가와 애송당으로 향했다. 1613년 현 위치에 터를 잡은 종가는 약 400년 된 조선 후기 무렵의 가옥으로 후대에 여러 중수 과정을 거쳐 평면 구조변경이 아닌 단순한 부재 교체나 번와 수준이었다면 고택의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하겠다.

1613년 광해군 5년에 애송당(愛松堂)은 문익현 선생께서 건립하시어 전해 내려오는 고가로 현재 14대째 대물림되어 잘 보존되고 있는 영암지방의 전통가옥이다.

다음은 구암사(龜巖祠)로 향했다. 구암사는 1668년 향사우(鄕祠宇)로 건립되었으나 지금은 남평문씨 문중사우로 사용되고 있으며 창건되던 당시에는 이후백, 문익주, 서명백 선생을 배향해서 ‘삼현사’로도 불리었다.

1687년 남평문씨 문중은 구암사의 강당인 양정재를 건립하여 문중 재실로 삼았으며 그 뒤 1868년에는 구암사가 서원 훼철령으로 해체되었다가 1928~1936년까지 다시 세우면서 남평문씨 명조인 문극겸 선생을 주벽으로 문맹화·곽추 선생을 추배하였다. 구암사는 처음 건립할 때 향사우의 성격을 가졌던 사우로 영암군의 향촌사 연구에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뽀송뽀송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열심히 설명해주시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메모해 보았다.

그런데 한가지 깜짝 놀란 일은 대동계 중요기록물인 ‘용하기’의 보존 상태를 보고 기절할 뻔 했다. 보관용 유리 진열장에 보관돼야 할 중요한 기록물이 캐비넷에서 사람 손에 들려 나오더니 이 사람 저 사람 맨손으로 만지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망이라면 관계 기관에서 현장을 잘 살피시어 특단의 보존·보호조치를 해서 귀중한 자료들을 후손에게 오래오래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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