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의병사(19)
■ 호남 의병의 선봉, ‘영암 의병’
광주 제외한 전남에서 유일하게 영암에 중대급 배치
‘호남창의소’ 중심 영암의병 활약 뜨겁게 불타 올라

한일합병을 1년 앞둔 1909년 가을 일본 정규군 2개 연대가 호남지역에 투입되어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일본군이 펼친 이 대규모 군사작전을 남한 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이라 한다. 당시 전남북 지역은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그러나 순종3년(1909년) 9월과 10월 두 달에 걸쳐 진행된 이 작전으로 의병 활동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사진은 호남지역 의병들(사진 위)과 남한대토벌작전에 투입된 일본 정규군의 모습.

일본군 수비대 배치현황을 보면 불과 5개월 사이에 일본군의 수비대 배치에 변화가 있음을 보여준다. 전남지역의 경우, 1907년 12월에는 광주에 일본군 국지대좌가 이끄는 14연대의 2대대 본부가 있었고, 전남 지방에는 영광에 1개 소대가 배치되어 있을 따름이었다.<표1>

영광에 일본군 1개 소대가 배치된 것은 김용구 등이 의병을 조직한 것과 관련이 있다. 김용구는 1907년 (음)8월 11일 영광에서 거병하여 그해 다음 달인 (음)9월 16일 기삼연이 조직한 ‘호남창의회맹소’의 도통령으로 활약하였다.

그런데 1908년 5월 일본군 수비대 배치표를 보면 보병 14연대와 별도의 임시파견기병대가 전남 여러 곳에 추가 배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표2>.

즉, 영암·광주·고부에 기병 중대급 부대가 배치되고, 해남·장흥·나산·영광·고창·담양·순창·정읍·이리·군산 지역에는 기병 1개 분대씩이 배치되고 있다. 이는 1908년에 들어 의병 전쟁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다른 지역과 달리 영암지역에 광주를 제외한 전남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중대급 기병대가 배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병 중대 배치 순서도 ‘영암’이 ‘광주’보다 앞서고 있다.

이는 ‘영암기병대’가 가장 먼저 배치된 부대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렇듯 ‘소대급’도 아닌 ‘중대급’ 기병대가 영암지역에 갑자기 배치되고 있는 것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이 지역에 ‘중대급’ 이상의 대규모 병력이 주둔할만한 치안 상황이 발생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표2>의 배치표는 1908년 5월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영암기병중대’의 배치는 1908년 1월부터 4월 사이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박평남이 이끄는 영암 의병부대가 일본군 구스모도(湳本) 대위가 이끄는 정예 수비대를 2월에 두 차례나 습격하여 다수의 일군을 사살하고 총기 5정을 노획하였다는 ‘영암군지’ 기록이 있다. 물론 일본군 토벌기록에는 이 내용은 없다.

별도의 <부록>으로 작성된 ‘전남의병 지역별 전투 현황표’는 영암지역을 비롯하여 전남 각지에서 전개된 의병부대와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 사실을 일본군 자료를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표>에 드러나 있지만, 대부분 일본군이 승리하였다고 한 것만 정리하였을 뿐 패배한 사실은 아예 누락시키고 있다. 재론하겠지만, ‘심남일실기’에 나와 있는 전투 사실은 빠져 없다.
여하튼 일본군 수비대가 1908년 2월에 박평남의 영암 의병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볼 때 늦어도 2월 이전에 영암지역에 일본군 기병 중대가 배치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일본 기병 중대가 영암지역에 급히 배치되었던 것은 박평남·박민홍 등 의병장들이 이끄는 영암 의병부대들이 ‘호남창의소’라는 이름으로 합진을 통해 세력을 키워가는 것과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결국 ‘기병 중대’의 배치를 통해 1907년 말~1908년 초 사이에 영암 지역에서는 ‘호남창의소’를 중심으로 의병들의 움직임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겠다.

영암에 기병 중대가 배치되자마자,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의 혼을 뺀 영암 의병부대는 끊임없이 기병 중대를 위협하였다. 영암 의병들은 일본군 헌병 보조원으로 활동하며 영암인들의 공분을 샀던 유덕만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1907년 6월부터 조선인을 헌병 보조원으로 채용하여 부족한 전투력을 보강하였다.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는 ‘이이제이’ 수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헌병 보조원으로 들어간 우리 민족은 거의 없었다. 헌병 보조원들은 부랑아들이나 무뢰배들이 많았다. 당시 영암 기병 중대에도 헌병 보조원이 78명 있었다. 이 가운데 횡포가 가장 심한 나주 출신 유덕만을 ‘영암 의병’이 사살하니 주민들이 크게 기뻐했다 한다. 주민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유행하였다.

산아! 산아! 월출산아! 떨지 마라
의병 총에 유덕만이 죽었단다
강아! 강아! 덕진강아! 울지마라
만고 악질 유덕만이 죽었단다.

어쨌든 1907년 말에 이미 영암 의병의 규모가 팽창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영암을 거점으로 하는 강력한 의병부대가 결성되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영암지역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역별 전투 현황표에 드러나 있듯이 영암 지역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투가 전개되었다.<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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