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의병사(18)- ■ 호남 의병의 선봉, ‘영암 의병’

박민홍 의병부대

박평남이 거의를 할 때, 또 다른 의병부대로 박민홍 의병부대가 있었다. 박민수라는 다른 이름도 사용하였다. 그의 동생 박여홍 또한 의병에 가담하였으니, 형제 모두 의병 전쟁에 뛰어든 셈이다. 박민홍의 출신지에 대해 논란이 적지 않다. 호남의병 연구자인 홍영기 교수는 그를 나주 출신이라 하였다. 나주 출신으로 판단한 근거는 뚜렷하지 않으나 주로 나주·영암을 무대로 활동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영암군지(1998)에도 박평남이 무기를 구할 목적으로, 일부러 나주 박민홍 대장 휘하의 병기감으로 들어갔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 때문에 박민홍을 나주 출신으로 판단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본적 불명’이라 하여 그의 출신에 대해 결론을 유보하고 있다. 그의 출신지를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주 출신이라는 확증이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박민홍이 영암 출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의병부대를 결성한 박평남이 빈약한 무기를 보완하러 일부러 박민홍의 부장이 되었다는 ‘영암군지’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민홍의 의병부대에 무기를 구하러 갔다는 데에서 박평남이 의병부대를 결성할 때, 박민홍 의병부대가 이미 결성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민홍이 결성한 의병부대 명칭도 ‘호남창의소’였다. 박평남이 영암 의병을 중심으로 결성한 의진 명칭도 ‘호남창의소’였다. 이렇게 본다면 각각의 의병부대를 거느렸던 박평남과 박민홍이 영암지역에서 ‘호남창의소’라는 명칭으로 연합의병 부대를 결성하였다고 여겨진다. 박평남과 박민홍은 ‘호남창의소’를 결성한 후에도 서로 독립된 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보아 ‘호남창의소’는 일종의 연합의병 조직체였다.

박민홍은 서리 출신이었다. 서리 출신이 의병부대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한말 나주 의병의 핵심을 이루었던 계층도 서리 출신이다. 영암에서도 서리 출신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사화 의병부대

같은 서리 출신으로 의병을 조직한 박사화가 있다. 그는 박민홍과 함께 심남일 의진의 중군장으로 활약하였다. 박사화는 100명의 의병을 이끈 독립의병장이었다. 박사화 의병부대의 제1초십장을 맡았던 영암 시종출신 김치홍이 심남일 의병부대의 기군장, 박민홍 의병부대의 제1초십장을 맡았다고 하는 데서 각각의 의병부대들이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김치홍이 여러 의병부대를 쉽게 옮겨 다니는 것은 당시 의병부대들이 분진과 합진을 비교적 어렵지 않게 하였음을 살피게 된다. 박사화와 박민홍의 사례가 그 대표적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박사화 또한, 영암에서 결성된 ‘호남창의소’의 핵심 의병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박사화는 나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암 덕진출신 박평남의 집에서 유숙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나주 출신이 아니라 영암 출신일 가능성은 없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설사 그가 나주 출신이라 하더라도 그의 활동 근거지는 주로 영암이었고, 영암 출신 박민홍과 연합하여 작전을 수행하고, 그를 따르는 의병들이 김치홍처럼 영암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를 ‘영암 의병’의 범주에 넣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박민홍은 영암 출신이라고 생각된다. 박민홍을 영암 출신으로 살핀 ‘영암군지’ 등의 기록들은 당시의 사정을 정확히 반영해 주고 있다고 본다.

박도집 의병부대

영암 의병의 또 다른 핵심 인물로 시종출신 박도집이 있다. 그의 휘하에 확인된 영암출신 의병들만 하더라도 무려 8명이나 된다. 강세국·고사현·김석순·김영동·김홍동·박양선·박정숙·이장옥 등이 그들이다. 그 또한 심남일 의병부대에 예속되지 않고 별도의 의병부대를 결성하며 활동을 하였다. 그의 부대는 심남일 의병부대와 함께 강진·남평·능주·영암·나주·장흥·해남 등지
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렇게 많은 공을 세웠다면 박도집은 심남일 의병부대에서 당연히 높은 직책을 받았을 법하다. 그가 심남일 부대에서 어떤 직책을 맡았는지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이것은 박도집이 별도의 의병부대를 가지고 움직였다는 근거이다.

박평남과 함께 영암 의병을 구성한 박도집은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도 심남일 의병부대, 박사화 의병부대 등 주요 의병부대들과 합진을 통해 활동하였다.

정태인 의병부대

정태인은 나주 동강 출신으로, 1907년 영암에서 의병 수십 명을 모병하여 의병부대를 구성하였다. 나성화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였는데, 영암을 중심으로 무안, 남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가 1907년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함은 적어도 박평남 등이 ‘호남창의소’를 결성할 때 참여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호남창의소’를 결성한 영암 의병으로, 영암 출신 의병장인 박평남, 박민홍, 박도집과 영암에서 주로 활동했던 박사화·정태인 의병장까지 포함하여 규모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박평남을 중심으로, ‘호남창의소’를 결성하여 분진과 합진을 하며, 영암지역을 거점으로 활동을 하였을 것이다. 심지어 다른 지역 의병부대와도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박평남은 해남 대둔사를 거점으로 활동한 추기엽 의병부대와도 연합작전을 하였다.

추기엽 의병부대가 영암 전투에 참여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때 박평남 부대와 연합작전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추기엽은 대한제국 장교 출신으로 해남 대둔사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전개하였던 인물이다.

영암 의병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며, 일본군을 압박하였다. 이에 대한 증거로 일본군 수비대의 배치현황을 들 수 있다. <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