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시종 옥야리 방대형고분과 신연리 9호분 영암지역은 시종 내동리 고분군, 와우리 옹관묘, 신연리 고분군, 자라봉 고분군, 옥야리 방대형고분 등 49건 187기의 고분들이 산재돼 마한왕국의 중심지임을 입증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유물·유적이 미 발굴된 상태지만 이미 발굴된 유적이라도 그 성격을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한의 중심지와 신연리 9호분

지난 9월 1일 정부의 2021년도 예산안이 발표되었다. 전남지역의 예산 가운데 마한 관련 예산에 국비가 30억 편성되었다는 항목이 얼른 시야에 들어왔다. 2020년 국비가 3억 정도 편성된 것으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는데, 이와 비교하면 약 10배 가까이 예산이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는 2020년 5월 입법화된 고대역사 문화특별법에 마한이 포함된 결과다. 앞으로 이 부분의 예산 지원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이제, 마한의 문화유산을 어떻게 정리하고 콘텐츠화하여 우리 지역의 정체성을 밝히고 나아가 마한문화가 한국 고대사의 원형임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일을 체계적으로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발굴 조사된 마한의 유적·유물에 역사적 생명력을 불어넣어 마한 사회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야 할 것이다.

지난 호에 영암지역의 마한 유적 발굴사업은 다른 지역에 비해 미치지 못함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비록 유적 발굴은 크게 미치지 못했으나 발굴된 유적·유물이 발산하는 많은 성격은 이 지역이 마한의 중심지임을 입증할 뿐 아니라 마한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이번에는 앞서 미처 설명하지 못한 나머지 발굴 조사된 마한 유적을 찾아보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성격의 일단을 추단할 것이다. 이미 자세히 별도로 설명한 바 있지만, 태간리 자라봉 고분과 옥야리 방대형 고분 역시 그 유적에서 출토되는 역사적 성격이 선황리 유적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이를 설명하기에 앞서 크게 주목하지 않은 학산면 금계리에 있는 ‘금계리 유적’이 있다.

미암 선황리식을 계승한 금계리 옹관

이 유적 역시 2004년 목포대 박물관에서 발굴보고서가 나왔다. 이 유적에서는 주구토광묘(26기), 토광묘(5기) 그리고 옹관묘(11기)가 확인되었는데 주구토광묘→옹관, 토광의 순으로 조성되었다. 이 고분에서 주목되는 것은 단옹식 합구식, 삼옹식의 옹관의 형식 가운데 목의 구분이 확연한 전용 옹관 2개를 연이어 만든 합구식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조영 시기는 출토 옹관들이 대부분 선황리식으로 알려진 고식 옹관을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기원후 3세기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조영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전용 옹관 고분의 시작인 선황리와 거리가 불과 4㎞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라는 점을 고려할 때 두 고분의 축조 세력이 동일한 집단은 아닐까 추정을 해본다.

한편, 태간리 자라봉 고분은 발굴조사를 통해 전방후원형 고분 형태의 축조과정을 완전히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석실 구조도 수혈식이 아닌 횡구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고분에서 출토된 목제 원형의 하니와는 광주 월계 1호분 주구에서 출토된 목기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고 한·일 사이의 목기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방사형과 원형 토괴의 옥야리 방대형 고분

선황리 유적과 함께 필자가 영암의 마한 유적에서 가장 강조하는 고분 유적은 옥야리 방대형 고분이다. 5세기 중반 조영된 것으로 보이는 이 고분의 주구에서 다량의 원통형 토기가 나왔는데 영암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원통형 토기이며 호형과 통형의 속성이 결합된 상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축조 과정에 사용된 회색 점토 덩어리(토괴)로 분구를 방사상과 동심원상으로 구획한 후에 분할하여 성토하는 방식은 왜계 양식과 가야계 양식을 융합하여 독자적인 옥야리식으로 완성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옥야리식 토괴 양식은 다시 일본의 고분 축조과정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처럼 옥야리 방대형고분의 축조과정에서 보이는 양상은 토착문화를 바탕으로 외래문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고유문화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영산강 유역의 고대 마한의 문화 수용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필자는 주목하는 것이다.

한편 남해만과 삼포강이 바라보이는 구릉상에 있는 신연리 고분군은 15기 이상의 고분이 열을 지어 있는 신연리 1151-2번지 일원의 고분군과 역시 같은 신연리 242-2번지 일원의 연소고분이 있다. 이 두 고분은 같은 신연리 행정구역 안에 있어 언뜻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조영 시기가 다르다는 점에서 단순 비교하는 것은 성급하다.

영암지역은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내동리 고분군, 와우리 옹관묘, 신연리 고분군, 자라봉 고분군, 옥야리 방대형고분 등 49건 187기의 고분들이 산재되어 마한왕국의 중심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들 고분이 대체로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반해 연소고분은 독립된 상태로 위치하고 있어 주변 고분과는 분포양상에서 차이를 보인다.
 
마한의 중심지와 신연리 9호분

1993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신연리 9호 고분은 4세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고 곱은옥, 대통옥, 흙구슬 등 여러 종류의 구슬이 다량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특히 구슬은 누차 언급하였다시피 ‘마한인은 금은보다 구슬을 더욱 중시했다’는 중국 기록에 있는 것처럼 마한을 상징하는 중요한 표식이었다. 이 구슬이 신연리 9호분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은 이곳이 마한의 심장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더구나 이 지역에 많은 고분이 밀집 조영되어 있는 것은 이곳이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세력의 근거지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신연리 9호분의 고분 조영 시기가 4세기라는 추정이 일리가 있다면, 이미 4세기에 마한의 강력한 왕국이 이곳에 형성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곧 필자가 추정한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을 포함하는 내비리국의 초기 모습을 신연리 9호분 고분에서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3세기 후반 백제가 목지국을 멸하면서 남하하는 것에 대항하여 3세기 말 결성된 마한 남부 연맹들의 모습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마지막으로 2017년 전남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한 연소 고분은 선분구 후매장형이고 일정한 범위의 정지면을 구축하고 그 위에 성토한 후 매장주체 시설을 구축하고 마지막에 성토하는 분구 동시형이다. 특히 분구는 1단계 정지작업→2단계 구축묘광→3단계 매장주체 시설 축조 및 분구 성토 →4단계 분구 완성의 단계로 조영되었다. 이 고분은 시기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어 앞의 신연리 9호분 보다 시기가 훨씬 뒤떨어진다. 따라서 두 고분의 성격을 현재의 행정구역이 같다는 이유로 쉽게 동일시하는 것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다만, 다른 고분의 밀집 지역과 떨어져 있는 것은 기존 세력과는 다른 것으로 보이나 이 고분 역시 호형 토기, 장란형 토기, 유리구슬 등 마한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는 유물들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같은 마한 세력이 축조한 고분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영암지역의 마한 고분은 비록 조사는 많이 되어 있지 않지만, 고분 하나하나가 모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임을 확인할 수 있겠다. 마한시대의 도래를 맞이하여 새로운 고분의 발굴조사도 중요하지만 기 발굴된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문헌기록과 비교하며 그 유물·유적의 성격을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필자와 같이 역사고고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몫이라 하겠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