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 선황리 유적 전경과 출토유물 미암면 선황리 874-1번지 일원에서 발굴 조사된 유적은 다른 유적과 달리 ‘생활 유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수혈 주거지 35기, 지상 건물지 4기, 옹관묘 1기 등이 확인되었으며, 유적은 대체로 AD 3세기 전반에서 4세기 전반으로 당시 마한인의 생활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발굴·조사된 영암유적 상대적으로 빈약

필자는 엊그제 나주 동강중학교에서 영암 시종, 나주 반남·동강이 ‘내비리국’이라는 마한 연맹왕국을 구성하였다는 특강을 하였다. 한국 고대사의 중심은 마한이고, 그 마한의 중심지가 영산강 유역이라고 하는 사실을 물론 강조하였다. 처음 들어본 얘기에 학생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영암 지역에서도 이러한 역사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전라남도 산하 전남문화관광재단 문화재연구소(소장 이범기)는 2019년 전남지역에 다양하게 흩어져 있는 마한 유적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전남의 마한 유적’이란 집성 자료집을 발간하였다. 광주를 제외한 전남 곳곳에서 이루어진 마한왕국의 유적·유물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을 통해 전남지역의 마한문화의 모습을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 본서에 소개된 유적이 231곳인데, 그 가운데 영암은 7곳에 불과하였다. 나주지역의 43곳과는 아예 비교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이웃 무안·함평의 17곳, 25곳과도 크게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영암에서는 해마다 마한축제가 열리고, 마한촌건립추진위원회가 활동하는 등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마한 역사에 관심이 높은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보다 마한 유적·유물의 발굴조사가 상대적으로 뒤처지고 있는 것은 영암이 마한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미처 살피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마한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이 하나로 결집돼 나타나지 못한 결과는 아닌가 한다. ‘전남의 마한 유적’에 소개된 영암의 마한 유적은 다음과 같다<표>.

번호         유적명                소재지                                  유적 성격
1      영암 금계리 유적             영암 학산면 금계리 산66-11     분묘 유적
2      영암 선황리 유적             영암 미암면 선황리 874-1       생활 유적
3      영암 옥야리 방대형 고분    영암 시종면 옥야리 159-2     분묘 유적(기념물84호)
4      영암 옥야리 고분              영암 시종면 옥야리 597-1     분묘 유적(문화재자료140호)
5      영암 태간리 자라봉 고분     영암 시종면 태간리 774       분묘 유적(기념물 190호)
6      영암 신연리 연소 고분        영암 시종면 신연리 242-2    분묘 유적
7      영암 신연리 고분군            영암 시종면 신연리 1151-2   분묘 유적(문화재자료139호)
 

영암의 마한유적은 역사적 가치가 높아

영암의 마한고분 규모나 숫자와 비교해 볼 때 발굴·조사된 고분은 크게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발굴·조사결과 나온 성과들은 하나하나 모두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들 고분 유적 가운데 옥야리 방대형 고분, 태간리 자라봉 고분이 지니는 특징을 누차 언급한 바 있지만, 영암지역 출토유물과 유적은 이곳이 마한왕국의 중심지로서의 역사적 위상을 지녔음을 거듭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 고고학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유물이 출토된 선황리 고분 유적·유물을 필자는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다. 선황리 유적은 학문적으로 유명한 유적·유물이 확인되었음에도 우리의 관심은 이를 따르지 못하였다. 영산강 입구인 영암군 미암면 선황리 874-1번지 일원에 자리 잡은 이 유적은 고분출토 유적·유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다른 유적과 달리 ‘생활 유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2004년 목포대 박물관이 발굴·조사한 이 유적에서 수혈 주거지 35기, 지상 건물지 4기, 옹관묘 1기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 형태는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인 주거 형태인 방형계통으로, 주거지 내부에서 화덕 시설과 벽면 아래를 따라 둘러진 벽구 흔적이 조사되었다. 출토된 유물과 방사성 탄소연대를 통해 유적은 대체로 AD3세기 전반에서 4세기 전반에 이른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에서 발형토기, 장란형토기, 옹형토기, 죽토기, 시루, 고배 등 다량의 생활 유물이 출토되어 주거지와 더불어 당시 마한인의 생활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를 제공해주었다.
 
선황리식 옹관은 전용 옹관의 출현 예고

그런데 이곳 선황리 출토 유적·유물 가운데 옹관묘 1기가 고고학적으로 단연 주목을 끌고 있다. ‘선황리식 옹관’이라 불리는 이 옹관은 일상 용기로 사용된 옹(甕)의 형태를 지니면서도 널(棺)로 사용된 형식을 띠고 있어 영산강 유역에 전용 옹관이 등장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곧이어 3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대형 전용 옹관은 옹관이 매장문화의 주체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이제 목관이 옹관으로 대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의 첫 옹관 출토는 1963년 신창동 유적에서였다. BC 1세기에서 AD 1세기 무렵으로 편년된 이 옹관은 납작한 바닥에 동체의 중하부가 볼록하고 외반구연인 재지 계통의 송국리형 토기와 삼각형점토대 토기의 양쪽에 쇠뿔 모양 손잡이가 달린 고조선 계통의 명사리식 토기가 결합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어 ‘신창동식 옹관’이라고 명명될 정도로 이 지역의 독자적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 옹관이 전용 옹관이 아닌 실생활에서 사용된 점토대토기를 이용하고 있어 본격적인 옹관의 이행기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곧 ‘신창리식 옹관’이 본격적인 옹관시대를 연 ‘선황리식 옹관’으로 발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신창리식 옹관이 선황리식 옹관으로 발전

선황리식 전용 옹관의 출현 배경에 대해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거나 영산강 유역에서 추가장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시신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대형 일상 용기를 옹관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같은 옹관을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부장품 등 후장 풍습이 있는 영산강 유역과 달리, 백제 지역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어 백제의 영향보다 영산강 상류에 위치한 신창동식 옹관이 발전되면서 나타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아울러 시신의 훼손을 막기 위해 옹관을 사용했다는 주장 역시 영산강 유역에서 후장(厚葬)으로 나타난 복장(複葬)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은 데서 나온 것이라 본다.<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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