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의병사(16)
■ 한말 의병 전쟁과 호남 의병

지리산을 무대로 한 삼남창의소

폭도의 수괴 김동신과 고광순은 전라남북도에서 폭도의 선구자였다는 일본측 기록이 있다. 회덕 출신 김동신은 1907년 음력 8월 초 내장산 일대에서 80명으로 거병한 후, 지리산 문수암 일대를 근거로 삼으며 활동하였다.

지리산에 가옥을 짓고 장벽과 방책을 세우는 등 의병들의 항쟁기지를 구축하려 하였다. 선봉-중군-후군의 전통적 삼군체제였으며, 충청·경상·전라도 등 3도 출신이 많았다. 주도층은 양반 유생이었으며, 병사층은 농민과 산포수·행상 등이 많았다. 구성 성분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학문적 동질성이나 지역적·혈연적 기반이 미흡하여 효율적인 항쟁을 하기에 결속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김동신 부대는 지리산을 근거로 전북, 전남, 경남 일대에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1907년 9월부터 1908년 6월까지 거의 1년 가까이 활동한 그의 의병부대는 800명으로 늘어났다. 1907년 9월 지리산으로 이동하여 김동신과 연합작전을 시도한 고광순 부대는 일본 군경과 전면전을 하기 보다는 ‘축예지계’(蓄銳之計), 즉 군사력을 기른 후 대일항전을 벌이자는 준비론적 장기항전 전략을 세웠다. 의병 전쟁의 새로운 양상이다.

의병 연합전선, 호남동의단

전해산은 장성·영광을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을, 심남일은 주로 남부지역을, 안규홍은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전쟁을 치렀다. 전해산과 심남일이 유생 출신이라면, 안규홍은 담살이 출신이다. 심남일의 호남의소의 경우, 1908년 3월부터 1909년 10월 9일 체포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23회나 헌병대나 수비대,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순서를 보면 강진-장흥-나주-화순-나주-보성-영암-장흥 유치 등 전남 남부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전라도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안규홍·전해산·조경환 의병부대와 수시로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전남 서부지역에서 활동한 전해산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심남일·이대극·안규홍 의병 등 11개 의병부대 약 2천명이 참여하였다. 심남일이 연합의진 형성에 가장 적극적이어서 ‘호남동의단’의 제1진이 되었다. 이것은 전기·중기 의병 때 분산적으로 활동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호남동의단’의 구성은 ‘기각지세’(犄角之勢)’ 형성에서 의진 간의 연합전선으로 전환해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후기 의병 때 호남 의병들은 연합작전을 수행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호남 의병의 사상적 기반 및 주도 세력

호남 사림의 정신적 지주였던 노사 기정진은 ‘임술의책’에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구할 방도를 찾으며 양민 위주의 개혁을 요구하였다. 병인양요 직후에 나온 ‘병인소’는 외세를 막기 위한 구체적인 대응책을 제시하여 척사운동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노사학파 사상은 위정척사 운동을 통한 존왕양이의 정통성 회복과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의병 활동의 전개 등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의병 항쟁은 위정척사 운동의 구체적 실천으로써 조선왕조의 마지막 근왕운동이다.

노사의 학문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기우만·기삼연·정재규·정의림·이승학·박원영·오준선·기재 등 의병에 투신한 사람이 많았다. 노사의 제자이자 손자로, 한말 호남 의병의 정신적 지주였던 기우만은 ‘기산림’이라 불린 호남의 대표적 유생이다.

호남 의병의 학통은 노사 기정진 계열과 면암 최익현 계열로 나눌 수 있다. 노사학파는 기우만·기삼연이 주도한 장성 의병과 호남창의회맹소 계통에 많았다. 반면 면암 계열은 태인 의병을 시작으로 호남지방의 중·후기 의병 활성화에 기여한 임병찬·강재천·백낙구·황준성 등이 대표적이다. 두 학파 계열은 초기에는 주도권 갈등도 나타났으나 점차 상호 연관성을 유지하며 호남 의병의 장기화와 활성화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후기 의병으로 갈수록 노사나 면암 계열의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그것은 의병 운동이 의병 전쟁으로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유생 중심에서 평민 중심으로 주도층이 바뀐 것과 관계가 깊다.

전기 의병의 주도 세력은 명문 양반 유생 중심의 장성 의병과 양반과 향리들이 함께 주도한 나주 의병으로 나눌 수 있다. 장성의 양반들과 나주 향리들이 완전히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연계를 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분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운동 당시 장성 양반과 나주 향리들은 반동학, 반개화, 근왕적 성향을 보였다.

중기 의병은 전기 때와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최익현·백낙구·강재천·양한규 등 전직 관료들이 상당수 가담하였다. 명문가 유생들보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유생들이 주도하고 있다. 고석진·고광훈·이광선·안찬재 등이 그들이다.

후기 의병은 전기·중기 의병과 주도 세력에 차이가 나타났다. 우선 다양한 계층이 주도 인물로 등장하며, 양반 유생들 가운데 명문가 후예들의 이탈이 두드러졌다. 기우만이 대표적인데, 그는 1907년 무렵 ‘擧義’에서 ‘守義’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 그는 의병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흰 삿갓을 쓰고 토굴에서 지내면서 의병전기 편찬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에는 농촌 지식인들이 의병장으로 대거 등장하고 있다. 김용구·김태원·김율·이석용·문태서·전해산·심남일 등은 서당 훈장 출신이었다. 중인 신분(김동신·박도경, 영암의 박민홍)·담살이(안규홍), 행상(강무경) 등도 주도층으로 등장하고 있다. 황준성(유생)·정원집·추기엽(해산군인) 등 이 지역으로 유배를 왔다 탈출하여 의병에 가담한 사례도 후기 의병의 특징이라 하겠다.
후기 의병에는 노사계열 및 면암 계열의 유학자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대신 일반 백성들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일제의 정치·경제적 침탈이 노골화되면서 이에 대한 위기의식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후기 의병의 성격이 ‘安民’을 지향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의병 전쟁의 기폭제, 영암 의병

‘영암 의병’으로 활동한 사람들 가운데 영암 출신으로 확인된 인물만 190명 가까이 된다. <부록: 한말 영암의병 현황> 일본군 주차사령부가 파악한 영암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한 영암 의병이 1908년 5월부터 1909년 9월까지 1천명 안팎이다. 전사자만 120명이 넘는다. 영암 의병은 영암은 물론, 나주·함평·무안·남평·능주·보성·강진·장흥, 그리고 멀리 해남까지 진출하여 의병 전쟁을 치렀다. 따라서 ‘영암 의병’으로 활동한 사람은 수천 명, 전사자는 1천여 명이 족히 되리라 짐작된다.

박평남의 영암 의병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호남창의소’, 그리고 영암 의병과 심남일 의병이 결성한 연합 의병부대 ‘호남의소’가 영암지역에서 결성되었다.<‘호남의소’에 속한 의병부대 현황 표 참조>

이처럼 영암지역에서 결성된 의병부대는 셀 수 없다. 전국 어디에도 한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의병부대가 활동한 곳은 찾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진다. 의병부대들은 국사봉을 중심으로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전남지역 의병 전투’ 도면 참조>

영암 의병들은 ‘호남의소’ 사령부인 국사봉을 중심으로 전남지역 중·남부 지역을 장악하여 일본군과 처절한 독립전쟁을 치렀다. 영암 의병들은 각각 독립된 의병부대들이 ‘분진’의 형태를 유지하며 ‘합진’을 통해 연합작전을 하였다. 이러한 연합작전은 후기 의병의 특징인데, 영암 의병에서 그 전형을 찾을 수 있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선봉장인 의병장 강무경의 아내 양방매는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유명하다. 금정 출신으로 오빠 양성일도 일찍이 의병에 투신하였다. 영암 의병들은 국사봉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의병들이 대포로 무장한 것은 영암 의병이 최초일 것이다.

영암 의병이 ‘호남의소’의 주력부대로 기능하며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일본군은 중대급 기병 중대를 전남지역 가운데 영암에 가장 먼저 배치하였다. 영암 의병 세력이 매우 커져 있음을 말해준다. 일본군 주력부대와 2년 넘는 전쟁에서 영암 의병의 인명 손실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그럼에도 1909년 10월까지 전혀 물러서지 않고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영암지역 주민들이 계속 의병으로 유입되고 있음을 뜻한다. 우리가 ‘영암’을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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