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의병사(15)- 한말 의병 전쟁과 호남 의병
1909년 이후에는 대부분 평민 출신 의병장들이 등장

최익현으로부터 시작된 중기 의병

1906년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정부 찬정을 지낸 최익현과 전 낙안군수 임병찬이 거병을 주도하여 조직된 태인의병은 불과 10일간 활동하다 관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지만, 이후 전라도 의병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전라도 최초 중기 의병이다.

홍주 의병을 조직한 민종식은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최익현은 의정부 찬정을 지낸 고관으로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충청도 정산으로 낙향한 송시열 학통을 계승하여 유생들을 중심으로 각 1천명이 넘는 대규모 의진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의병 활동은 지배층들의 결사적인 항전이었기에 일제는 두 의병부대에 대한 처벌을 가혹하게 하였다. 호남의 유생들과 접촉을 하고 있던 최익현은 민종식의 거병 소식을 듣고 거병을 계획하였다.

그가 “지금 우리는 군사가 훈련되지 못했고 무기도 이롭지 못하니 반드시 각 도, 각 군과 세력을 합쳐야만 일이 이뤄질 것이니, 나는 마땅히 남으로 내려가서 영남과 호남을 일깨워 호서와 함께 서로 성원이 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그의 거의 뜻을 살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같은 화서학파인 유인석 및 영남과 기호의 유생들에게 글을 보내 동시에 거병할 것을 제의하였다.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인 의병을 일으키려는 전략이었다. 임병찬은 최익현의 명을 받아 의병을 조직하였다. 최익현은 기우만과 담양 용추사에서 만나 거병을 논의하였으나 뜻을 모으는 데 실패하였다.

6월 4일 무성서원에서 거병 사실을 공포한 태인 의병은 무기를 모으고, 정읍·순창·옥과·곡성·담양 등 노사학파의 영향이 비교적 덜 미쳤던 전남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그리고 포수 출신을 의병으로 모집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봉기한 지 일주일 만에 태인 의병은 포수 출신 200~300명, 유생 500명을 포함하여 900명이 되었다. 최익현의 제자이면서 호남의 재지 유생으로, 사상적으로 신념이 확고한 인물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지역적으로는 태인·고창·정읍·진안 등 전북 출신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고, 전남 출신들은 동부지역이 많았다. 최익현 의병을 구성한 ‘12의사’로 불린 핵심인물들 가운데 임병찬 외에 전남 출신으로 나기덕(나주), 문달환, 양재해(이상 능주), 유해용, 조영선, 조우식(이상 곡성) 등이 있었다. 영암출신 최기성·신준성·문윤백 등도 순창 거의에 참여하였다.

태인 의병은 몇 차례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관군이나 일본군과 직접적 전투는 피한 채, 무기와 군량미 등을 확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세를 키워 일본과 외교적 담판을 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이다. 1천 명의 태인 의병이 움직이자 전주·남원 진위대를 비롯하여 광주 진위대까지 동시에 출동하였다. 순창에서 진위대와 마주친 최익현은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라 하며 의병의 해산을 지시하였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1906년 8월 14일 쓰시마섬으로 유배되었다. 최익현은 1907년 1월 1일(음 1906.11.17.)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태인 의병은 비록 10일간 짧은 활동을 하였지만, 상소 형태의 청원운동을 지양하고 무장투쟁으로 선회하여 후기 의병의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태인 의병에 가담한 일부 의병들은 1912년 임병찬이 주도한 독립의군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중기 의병이 후기 의병으로, 그리고 다시 전환기의 의병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태인 의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태인 의병과 더불어 중기 의병을 대표하는 호남창의소(쌍산의소)는 화순 쌍봉(쌍산)에서 유생 양회일·이백래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다. 능주·화순을 중심으로 정읍·보성·남원 출신들이 주로 참여하였다. 을사늑약 이전부터 거의를 준비하였던 양회일은 태인 의병이 해산되자 거병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고광순, 기삼연과 만나 각기 출신지에서 거의하기로 하였다. 이광선·노현재·임창모 등 200명으로 의진이 구성되었다. 쌍산의소에서 1906년 10월부터 1907년 3월 초까지 6개월 간 의병들을 훈련을 시키고, 선봉-중군-후군의 3군 체제와 3군이 포군과 보군으로 구성한 것은 장성·태인 의병보다 진일보한 전투부대라 하겠다. 이들은 1907년 4월 화순을 점령하였다. 양회일이 체포되어 부대가 해산되자, 임창모는 안규홍, 유화국은 기삼연, 안찬재는 심남일 의병부대로 이진하여 이름을 떨쳤다.

전직 관리 백낙구는 시력을 잃고 광양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 태인 의병에 합류하려 했으나 해산되는 바람에 돌아왔다. 1906년 11월 의병을 일으켰다. 한편 장성 의병으로 전기 의병에 참여하였던 고광순은 태인 의병에 참여하려다 좌절되자 1906년 12월 11일(음) 창평에서 그의 일족을 중심으로 독자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남원, 능주, 동복 등지에서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지리산 연곡사에 의병 전쟁 기지를 구축하였다. 의병 1천명에 달하였다. 1907년 10월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후기 의병의 중심, 호남창의회맹소

호남창의회맹소는 1906년 봄 영광 김용구·장성 기삼연이 조직한 일심계가 모태였다. 기삼연은 1907년 10월 장성 석수암에서 거병하였는데, 50명으로 출발하였으나 곧 400명으로 늘어났다. 나주(김태원), 장성(이철형), 함평(이남규) 등 서부지역 의진들이 합류하여 1907년 9월 24일(음) 기삼연을 맹주로 하는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되었다. 대장-통령-참모-종사-선봉-중군-후군 등 조직체계가 정비되었다.

기정진의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특히 기삼연은 전기 의병 때 의병해산 조칙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강원도와 경상도 의병부대와 연대를 모색하였으며, 친일 조직인 일진회와 자위단 회원 제거와 더불어 납세거부 투쟁, 수입품 불매운동 등 주민들의 생존권을 우선시하는 ‘안민(安民)’의 모습도 보인다. 역둔토와 궁장토의 도조를 회맹소에 납부를 하라는 주장은 회맹소가 최초 언급한 것이다. 호남창의회맹소는 ‘포고만국문’을 각국 공사관에 보내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한편으로 교린을 주장하였다. 외세를 무조건 배척하자는 주장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활동 목표와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후기 의병의 선도적 위치를 차지한 ‘호남창의회맹소’는 의진 간의 연합작전도 전개하였다. 법성포 주재소를 습격할 때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이영화 의병 연합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1907년 10월부터 시작된 창의회맹소의 활동은 기삼연이 체포되던 1908년 2월 2일까지 계속되었다.

1907년 12월 기삼연은 장성·순창 지역에서, 김태원은 영광·나주·함평·무안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또한, 중요한 전투에는 서로 연합작전을 벌이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의진의 규모를 최소화하면서도 지역별로 유격투쟁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분화 모습을 통해 회맹소가 합진보다 연합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여러 차례 분화과정을 거치고 있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체포되어 순국한 이후에는 김용구와 김태원·김율을 중심으로 분화되었다. 1908년 4월 김태원과 김율이 순국한 이후에는 심남일·조경환·전해산·오성술·안규홍·박도경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재편되었다.

1909년 이후에는 대부분 평민출신 의병장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전의 유생출신 의병장들이 대거 전사, 체포, 부상과 일제의 침략 정책으로 삶의 위협을 느낀 백성들이 의병에 대거 합류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분진과 합진은 의병 전쟁이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의진 사이 합진의 전형적인 특징은 영암 의병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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