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38>마한 남부 연맹체의 리더 ‘침미다례’ 재론(上)

해남 옥천면 만의총과 토우 4~5세기로 추정되는 백제, 가야, 왜, 신라 등 여러 지역의 유물들이 출토된 해남군 옥천면 성산들의 만의총 1호분 전경(사진 왼쪽)과 여기에서 출토된 토우 모습. 이곳에서 출토된 여러 유적은 당시 이곳이 국제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대외무역을 바탕으로 이곳 마한왕국 침미다례가 대국으로 성장했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7월 3일 해남에 출장을 다녀왔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 녹취와 관련해서다. 국권을 피탈 당한 식민지 백성의 설움이 곳곳에 배어 있는 90이 훨씬 넘는 생존 어르신들의 증언은 눈물 없이는 차마 들을 수 없었다. 대부분 어르신들이 75년 동안 가슴에만 담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한 사실들을 역사의 기록을 위해 흔쾌히 구술에 응해 주신 데 대해 가슴 뭉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국가의 소중함을 강조하였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잘 알다시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우리가 살피는 대부분의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다는 점을 항상 의식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진실을 찾기가 쉽지 않다. 후손이 똑똑하면 하찮은 조상의 역사도 찬란한 역사로 만들 수 있고, 심지어 반역의 역사도 애국의 역사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것을 친일 잔재 청산과정에서 우리는 충분히 목격했다. 역사를 살필 때는 항상 ‘왜’라는 의문을 품고 접근하지 않으면 역사의 본질을 놓칠 가능성이 크다.

지난 3일 동안 해남 출장길에 필자의 뇌리를 계속 지배하였던 것은 마한의 대국이라고 우리가 살폈던 ‘침미다례’왕국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침, 옥천면 성산들에 있는 만의총이 눈에 들어왔다. 만의총은 정유재란 때 이곳 성산들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죽은 1만 명의 시신을 한 곳에 안장하였다 하여 붙여진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덤은 이미 그 이전에 지역을 장악한 정치세력의 무덤으로도 전하여졌다. 2009년 동신대 박물관이 고총 가운데 1호분을 발굴 조사한 결과 4~5세기로 추정되는 백제, 가야, 왜, 신라 등 여러 지역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해남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침미다례는 중계무역을 통해 성장했다

중국 기록에 따르면 낙랑에서 왜와 교류를 할 때 ‘낙랑-서해-남해-김해-대마도-왜’로 이어지는 항로를 이용하였다 한다. 이 해상 루트를 따를 때 해남반도는 일찍부터 중간 정거장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곳을 통해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해남 군곡리 패총에서 출토된 화천 등 중국 화폐는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만의총 1호분에서 나온 여러 지역의 문물들은 당시 이곳이 국제무역의 중심지였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대외무역을 바탕으로 이 지역의 마한왕국 침미다례는 대국으로 성장하였을 것이다.

이 지역에 일본서기에 보이는 침미다례가 있었다고 보는 근거를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즉 일찍이 고대 지명이 언어와 깊은 상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침미다례’가 음운상으로 침명현(해남), 훈독상으로 도무군(강진)과 비슷하고, 지리적으로도 고해진과 가까운 강진·해남 일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인근 송지면 군곡리의 거대 패총, 삼산면 신금리 주거 유적과 옥녀봉 토성 유적, 장고산과 용두리에 있는 거대한 장고분 등은 이 지역에 일찍이 강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장고산 고분이 있는 해남 북일면, 용두리 고분이 있는 삼산면은 일찍이 행정구역이 강진이었고, 그곳과 해남 송지면 군곡리 패총이 있는 백포만 해안까지 불과 30여㎞ 정도 떨어져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강진만과 해남반도 일대가 침미다례의 영역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이러한 침미다례가 마한 연맹체의 중심 세력의 하나로, 위지 동이전의 ‘대국’이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측 진서(晉書) ‘장화전’ 기록에서 이러한 사정을 충분히 살필 수 있다.

“(282년)동이 마한의 신미 등 여러 나라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살았다. 유주와 4천여 리 떨어져 있다. 여러 대에 걸쳐 사신을 보내지 않았던 20여 국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 去州四千餘里, 歷世未附者二十餘國, 並遣使朝獻) 9월에 동이 29국이 귀화하여 방물을 바쳤다.”

3세기 말 마한 세력과 중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명한 기록이다. 여기에 보이는 ‘신미’는 유주와 4천여 리 떨어져 있고 바다를 끼고 있는 곳으로 미루어 볼 때 한반도 서남해안으로 추정되고, ‘침미’와 음이 비슷하므로 ‘침미다례’와 동일 왕국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침미다례’가 ‘진서’ 장화전의 ‘신미국’과 음이 비슷하다는 주장은 이병도가 일찍이 주장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따르고 있다. 백제사의 권위자인 노중국은 ‘침미’와 ‘신미’가 음이 비슷하고 ‘다례’는 국(國), 읍(邑)을 의미하는 ‘다라·드르’와 상통하기 때문에 ‘침미다례’는 ‘신미국’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마한 남부 연맹을 결성하였다

처음에 신미국을 포함한 20여 국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고, 다시 29국이 귀화를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귀화’라는 표현은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을 당시 유주자사 장화가 과장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할 때, 적어도 신미국을 포함한 29개 왕국이 중국에 조공하러 간 사실을 보여준다. 이때 29국은 같은 연맹체로, 시기적으로 3세기 말이면 목지국이 무너진 직후 마한이 정치적으로 요동칠 무렵이었다. 절반 이상이 넘는 마한 연맹 국가가 백제 중심의 연맹을 거부하고 신미국 중심으로 합류한 모습으로 보인다.

특히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이라는 구절이 주목된다. 이를 백제가 마한을 대표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동이의 백제와 신미’라고 대칭적으로 살피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동이에 있는 마한의 신미국’으로 이해하여 신미국이 동이의 마한의 정통성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백제를 굳이 넣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말하자면 당시 중국에서도 신미국, 즉 침미다례가 마한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침미다례와 함께 한 29국에는 노령산맥 이남에 있는 13국은 물론 차령산맥 이남 즉 목지국 이남의 정치세력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침미다례는 목지국이 강성해 있을 때도 목지국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목지국이 전체 연맹에 대한 영향력을 가졌을 것이라는 기존 인식과 달리, 침미다례는 백제는 물론 목지국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하면서 3세기 중엽부터 1세기 이상 남쪽에서 마한 연맹의 패자로 우뚝 서 있었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