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36> 태간리 자라봉 고분과 마한왕국 영암(上)

시종 태간리 자라봉 전방후원형 고분은 영산지중해 정치 세력의 깅한 힘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시종 태간리 자라봉 고분은 시종·반남의 정치적 위상을 대변해주고 있다.

지난 6월 12일부터 13일까지 양일간에 걸쳐 영산강 유역 마한의 역사와 문화규명을 위한 학술회의가 광주에서 전라남도와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국립나주박물관, 전남문화관광재단이 공동주최하고 마한연구원의 주관 아래 열렸다. 이번 세미나는 ‘장고분의 피장자와 축조배경’을 주제로 국내외 연구자 38명이 논문을 발표하는 대규모 세미나였다.

장고분에 대해서는 이미 2019년에도 국립나주박물관에서 ‘한국의 장고분’이라는 자료집을 편찬하여 그동안의 발굴 조사된 장고분을 자세히 안내하였다. 이와 같이 연이어 장고분에 관한 자료집 제작이나 세미나가 열린 것은 그만큼 장고분의 해명이 한국 고대사 특히 마한사의 해명에 있어 중요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장고분’과 ‘전방후원형고분’ 용어의 혼란

원형부와 방형부로 구분되는 분구(墳丘)가 합쳐져 단일 분구의 형태를 갖춘 이른바 장고분(長鼓墳)은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된 거대한 고분의 형태로, 그 피장자의 성격은 물론 명칭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 우리가 흔히 장고분이라 부르는 고분은 분구의 형태가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유사하다고 하여 ‘전방후원분’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견해,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의 정치체계를 상징하는 의미로도 사용하기 때문에 그 명칭을 쓰게 되면 영산강 유역과 왜 왕권이 관계가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어 ‘전방후원형 고분’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견해, 외형은 전방후원분과 비슷하나 이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장고산’이라는 지명 및 장고와 닮았기 때문에 ‘장고분’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그러나 광주 월계동 고분 등에서 출토된 분주 토기 등이 왜에서 나온 ‘하니와’와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일본의 전방후원분하고 같은 성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곧 살필 영암의 태간리 자라봉 고분은 ‘자라’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장고’ 명칭과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장고분’이라는 명칭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영산지중해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는 전방후원형 고분이 형태는 왜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축조 기술이나 출토 유물에서 보면 왜 왕권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보이지 않은 채 독자성을 간직하고 있어 ‘전방후원형 고분’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최근 학계에서도 ‘전방후원형 고분’이라는 용어 사용이 바람직스럽다는 의견이 많다. 따라서 우리 지역에서 이 고분 형태를 ‘장고분’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좀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전방후원형고분, 임나일본부설 근거로 이용

1938년 일본인 유광교일이 나주 반남 고분군을 발굴하고 작성한 보고서에 한국의 전방후원형 고분에 대해 최초로 언급하였다. 그는 나주 신촌리 6호분과 덕산리 2호분의 분구 형태가 일본의 전방후원분을 방불케 한다고 기록하였다. 이후 1984년 해남 방산리 장고봉 고분의 발견을 시작으로 1980년대에 함평 예덕리 신덕1호분, 함평 마산리 1호분, 영암 태간리 자라봉 고분, 해남 용두리 고분 등이 잇따라 확인되었다. 이어 광주 월계동 고분과 명화동 고분 등이 확인되는 등 이제까지 확인된 유적이 14기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들은 영산강 유역에 존재한 전방후원형고분을 일본의 ‘임나일본부’의 실재로 주장하였다. 최근 시종 태간리 고분 등 영산강 유역에서 고분이 잇따라 발견되자 이 지역이 ‘임나일본부’ 관할 아래 있었다는 과거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 관련하여 일본에서 큰 관심을 가졌다. 반면, 한국 학자들은 행여 ‘임나일본부’와 관련되는 것을 우려하여 전방후원분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방후원분 문제는 한·일 양국 사이의 현재적 상황과 관련하여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전방후원분은 일본에서 3세기 후반에 나타나 6세기까지 유행하였던 고분이고,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도 그것과 유사한 측면이 적지 않다. 말하자면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의 출현은 어디까지나 두 지역의 문물 교류의 산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을 조선반도 정복설의 근거로 삼거나, 반대로 일본의 억측에 대한 피해 의식에서 역사적 실상과 동떨어진 해석을 하는 것 모두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영산지중해 정치체 힘의 상징 전방후원형 고분

전방후원분은 고분의 형태가 앞부분은 방형이고 뒷부분은 원형으로 조영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일본에서는 3세기 고분 시대에 출현한 이래 4세기 후반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대형고분으로 발전하였다. ‘大王墓’라 불리는 거대 전방후원분들이 밀집되어 있는 일본의 百舌鳥·古市 고분군이 있는 곳이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들어오는 입구인 오사카만과 정치 중심지인 나라 분지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외국 사신들에게 왜 왕조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거대 고분을 축조했다는 의견이 있다.

시종·반남 일대에 수십 기 이상 남아 있는 거대한 옹관 고분은 교류를 통해 가야나 왜의 거대 고분의 실상을 알게 된 내비리국 등 영산강 유역의 재지 세력들이 그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영한 것이었다.
 
시종 정치체의 세력 과시, 태간리 자라봉고분

그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신촌리 9호분 같은 고총(高塚)의 옹관 고분을 조영하였던 영산강 유역의 연맹체들이 일본의 거대 고총인 ‘전방후원분’에도 주목을 하였던 것은 아닌가 한다. 전방후원분, 즉 영산강 유역 장고분들이 왜와 유사한 측면도 엿보이지만, 재지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어, 재지 세력들이 마냥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관점에서 채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곧 전방후원형 고분은 영산지중해 정치 세력의 깅한 힘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바로 이러한 대형고분의 하나가 영암에도 있다는 점은 이 지역의 정치적 위상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시종 태간리 자라봉 고분이 그것이다.

이 고분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90호’로 지정되었는데 영암군 시종면 태간리 774번지 일원에 있다. 그러니까 시종 반남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한왕국의 중심에 위치하여 있는 셈이다. 이 고분은 서쪽의 태봉산(해발 83.4m)과 동쪽의 해발 20~30m 구릉사이에 형성된 곡간평지에 위치하여 있다. 이 고분은 고분의 형태가 움직이는 자라 모양을 하고 있어 자라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마을 주민들은 전하고 있다.

이 고분의 존재는 1986년 목포대 박물관의 지표조사로 처음 알려졌다. 최초의 조사는 1991년 8월 2일부터 9월 11일까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 중앙연구원)이 발굴 조사한 이래 대한문화재연구원에서 2차(2011년), 3차(2015년)에 걸쳐 발굴 조사를 하였다. 이후 2015년 5월 조사 내용을 토대로 분구를 정비·복원하였다.

이 고분은 장축 방향은 남-북이며, 원형부가 북쪽, 방형부가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분구의 규모는 전체 길이 37m, 방형부 너비 20m, 높이 2.4m, 원형부 지름 24m, 높이 4.6m이다. 분구의 규모는 다른 고분에 비하여 소형으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전방후원형 고분 가운데 11번째 크기에 해당한다. 발굴조사 결과 이 분구는 모두 6단계의 축조과정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데 자세한 축조과정 및 출토 유물, 그리고 이 고분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살피도록 하겠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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